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다.
한가위가 다가온다. 나는 결혼 40년 차 칠 남매 맏며느리다. 이번 추석에는 전도 부치지 않았다. 김치도 담그지 않았다. 도라지, 숙주나물도 안 했다. 식혜, 토란국도 끓이지 않았다. 대표 메뉴인 양념꽃게도 무치지 않고 갈비도 재지 않았다. 심지어 추석은 10월 6일 월요일인데 10월 3일에 미리 과일만 싸들고 온 가족이 성묘를 다녀왔다.
천여평이 되는 산소는 일주일 전에 벌초를 하여 말끔해진 초록빛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였다. 비가 그친 틈을 이용하여 서둘러 돗자리를 펴고 준비해 간 과일과 송편 등을 진설하고 절을 하였다. 물론 이 맏며느리가 부실하여 거하게 한 상 차리지 못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고, 그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드렸으니 이해해 주실 거라 믿으며 산을 내려왔다. 여행 떠나고 남은 가족들이 둘러앉아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창 넓은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우플라자에 들러 갈비탕 2그릇을 사들고 왔다. 미리 사다 놓은 당면을 불리고 큰맘 먹고 사온 비싼 시금금금.... 치를 데치고 각종 고명을 볶아 넣고 달랑 잡채 한 가지를 만들었다. 몇 주전에 담가서 먹던 배추김치와 물김치, 그래도 서운하여 전날 볶아 놓은 완도산 고사리나물을 상에 올렸다. 우리 부부와 아들 내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까지 다섯이 앉아 먹은 조촐한 저녁으로 우리 집 한가위는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달 전부터 이번 추석에는 20여 명이 넘는 가족들을 위해 어떤 반찬을 만들지 고민하며 메뉴를 짜고 미리 사도 되는 물건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배추김치와 나박김치를 담그고 식혜를 만들었다. 그뿐인가 고구마, 김말이, 오징어, 새우 등 각종 튀김을 만들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쿠키도 만들어 놓았다. 추석 전날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만들고 녹두전, 동그랑땡, 꽂이, 동태 전 등을 부쳤다.
하루에 다하기에는 너무 많은 음식들. 동서들과 분담하여 한쪽에서는 고사리, 숙주, 도라지나물을 볶고 나는 미리 사다 손질해 둔 꽃게를 꺼내어 새빨갛게 무쳐냈다. 쉴틈도 없이 미리 재워 놓은 갈비와 소고기산적, 조기도 굽고 토란국을 끓이고 상에 올릴 과일과 술, 포, 약과, 산자 등도 완벽하게 준비했다. 이것만 하면 서운하다. 구절판을 하거나 탕수육을 만들거나, 꽃빵을 곁들인 고추잡채 등 특별식을 만들어 상에 올렸다.
4형제의 식구들만 해도 며느리, 사위, 손주들까지 모두 24명이다. 우리 딸은 시댁에 미리 다녀오거나 명절을 지내고 바로 떠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전을 따로 준비해 두었다가 싸서 보내기도 했다. 혼자 살고 계시는 사돈께서는 명절을 대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자식들이 오는 날에 시장에 들러 몇 가지 음식을 사서 산소에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하여 우리 딸은 시댁에서 명절음식을 해본 적이 없다. 어쨌든 우리는 왁자지껄 그동안의 일들을 풀어놓으며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먹고 양손 무겁도록 싸서 보내고서야 마무리가 되었을까.
아니다.
시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시기 전에는 세분의 시누이들이 모두 다녀가시고 나서야 긴장의 끈을 놓았다. 되돌아보면 힘든 줄 모르고 뛰어다니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수없이 시장을 다니며 물건들을 사서 나르고 지지고 볶으며 동서들과 나누던 수다들. 이제 익어가는 나에게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몇 년 전부터 기능성 소화장애로 몸무게가 줄어들고, 코로나19 감염으로 폐도 나빠져 병원 가는 날들이 늘어만 간다. 그런 나를 위해 형제들이 결단을 내렸다. 추석은 산소에서 간단하게 제를 올리고, 이참에 장성한 조카들은 긴 연휴를 이용하여 여행도 다녀올 수 있도록.
10월 4일 아침. 일찍 일어나 요양원에 가져갈 짐을 쌌다. 10여 년을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홍시와 호박죽, 생크림 카스텔라, 요플레, 음료, 달달한 믹스커피, 두고 드실 만한 부드러운 간식들까지 빠짐없이 챙겼다. 이번에는 매번 애타게 찾으시는 우리 아들과 함께 갔다. 손자손을 잡고 어찌할 바를 모르시며 비비시고 한시도 놓지를 않으셨다. 첫 손자이기에 엄마인 나보다도 더 애지중지 돌봐주셨다.
그런 손자보다 더 한 주인공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손녀다. 왕할머니는 그런 증손녀를 알아보진 못해도 그 고운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셨다. 정해진 면회시간이기에 가져간 음식들을 아들과 함께 먹여드리고 사진도 찍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늘 죄스러움이 고드름처럼 매달리지만 애써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우리 곁에 있어달라고.
아들도 처가로 떠나고, 딸은 이미 칠순을 맞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떠났다. 긴긴 연휴를 집에서만 보낼 수 없어 우리도 짐을 샀다. 흐릿한 날씨지만 행선지도 정하지 않은 채 떠나보려 한다. 지금까지 내게 조상을 모시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그들의 후손으로 살아가야 한다. 다만 시대의 흐름도 있고, 각자 상황에 따라 그 마음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부디 40년 동안의 그 정성을 조상님께서도 헤아려 주시기를 바라오며... 앞으로도 조상님께 감사한 마음은 한가위의 보름달처럼 커져만 갈 것이다.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317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