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의 끝에서 마주한 나
연휴 때 줄기차게 본 영화가 두 편 있다. 하나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_
또 다른 것은 ’퀴어!!!‘ 개봉했을 때부터 보고싶었는데, 직장인에겐 너무 어려운일이라… 이번에 시간을 내서 봤다.
확실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전작 ‘콜미 바이 유어네임’과는 다른 느낌이더라. 그 첫사랑의 풋풋한 느낌이 모두 빠진.. 늦가을, 초겨울의 영화랄까? (그래서 어제는 ‘만추’를 보았다죠!) 무엇보다 제임스 본드 연기를 했던 다니엘 크레이그의 재발견이었다. 중년이지만 열기 가득한 사랑과 거기서 오는 위기를 그 처절함과 위태로움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함께 아파하면서 봤다. 아직 젊은 나에게도 그 어떤 간절함이, 자기혐오가 모두 다 전달되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을 견디기 힘든 사람이 어떤 선택을 내리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퀴어인 ’리‘는 자기의 성정체성을 모두 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시대/문화상으로도 이해받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이 모든 것을 알아서 도피하듯 멕시코 땅으로 건너와, 술과 마약으로 도피하며 산다. 그리고 그도 안다. 자신도 도피라는 것을.. 하지만 그런 방법밖에 모르는 그이기에 마약과 독한 술, 게이바를 전전하며 잠깐의 섹스로 연명해간다. 즉, 통제를 상실하고 자기파괴적인 도피만 반복하며 사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인물인 유진이 나타난다. 젊고, 탄탄하며, 매력적인.. 그런 퀴어인듯 퀴어같지 않은 남자! 실제로 리가 유진을 묘사하는 단어도 cold, slippery, non-queer? 이다. 차갑고, 잡히지 않고, 퀴어같지 않은…. 리는 유진을 몹시 갖고 싶어하면서도 그가 자기를 부담스러워할까 두려워 적극적으로 다가가질 못한다. 이때의 연출이 미쳤음!!! 영화를 같이 보는 두 남자를 보여주면서, 리(다니엘 크레이그)가 유진을 만지는 영상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욕망을 환영같은 영상으로 보여주는 이 장면은.. 얼마나 리가 절제중인지, 동시에 그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뻔한 연출이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유진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내 눈에는 리가 되고 싶은, 또 다른 젊은 정체성의 재현처럼 보였다. 젊고, 차갑고, 퀴어같지 않은 자기 통제적인 모습 말이다. 유진이 실제 인물인지, 리가 만들어낸 환상인지 모르는 이 모호한 경계가 리의 자기혐오와 욕망, 도피적 하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리는 야헤라는 식물을 통해, 계속해서 무엇을 찾고 싶어한다. 계속해서 마약으로 고통에서, 실재(Réel)에서 도피하던 그였기에 야헤를 찾는 것이 습으로 보일수도 잇지만… 이건 좀 다른 결이다. 중년에 이르러서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느낀 그는 어떤 본질- 자신의 밑바닥-을 보고싶어한다. 그리고 이 길에 유진이 동행한다. 무의식의 밑바닥으로 안내하는 식물의 이름조차 야헤라니,야훼의 메타포인걸까?ㅎㅎ
하, 여기서 나의 맘에 안드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바로, 야헤를 찾으러 가는 길에까지, 그 오지에까지 가서 살고있는 미국인이다. 아니!!! 꼭 이런 ‘미국인이 구원한다.미국인이 키를 쥐고있다‘라는 메세지를 넣어야 했나요…? 그리고 그 야헤라는 식물을 찾고 무의식의 세계를 안내하는 자도 의심 많은 이 미국인 언니다. 왜 굳이…? 제국주의적인 면을 넣어야 했을까요? 이미 타락한 미국인이 멕시코땅에 가서 마약하고 술마시며 살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식민지 지배를 떠오리는걸요ㅜㅜ
무튼, 리는 본다. 자신의 밑바닥을!!! 유진도 함께. 무언가를 토해내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본다. 그리고 유진은 ‘나는 퀴어가 아니에요’ 하고 사라진다. 리는 그 오지에서 멕시코 시티로 돌아온다. 외부환경은 그대로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지만, 무언가는 변했다. 유진이 만일 그가 선망했던 어떤 될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정체성이라면(젊고, 냉정하며, 자신을 넌퀴어라고 지칭하는)… 이젠 그런 욕망을 떠나보냈다. 자신의 늙음과 이리저리 욕망에 흔들리는 약함, 그리고 퀴어인 모습을 받아들인 것 같이 보인다. 그게 자발적 항복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일지라도 ………
다니엘 크레이그는 리의 자기혐오와 욕망 사이의 미묘한 균열, 도피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인간적 감정을 잘 살렸다.
전반적으로, 나는 리의 도피적 하강을 통해 내적 하강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리처럼 도피하지 않고, 내 안의 실재와 그림자를 직면하며 내려가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와닿았다.
마약이나 술, 자극적 영상, 쇼츠와 같은 외부자극으로 인해 수혈을 받는 삶은 한계가 있다. 그런 도피는 자기를 갉아먹고 소진시킬 뿐이다. 쾌락이 멈출 때 그 공허함이 배가 된다. 도망칠만큼 도망쳤다면, 이제는 자기와 승부를 봐야한다. 나의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쓴 그것을 직접 봐야하는 것이다.
이건 이 묘사처럼 더럽고 추접하기만 하진 않다. 이걸 본 뒤에 어떤 평화가 존재하니까! 프루스트의 문장을 빌려오자면 ‘필연성 뒤에 자유로움‘이랄까? 의지의 힘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도 있고…. 매 순간이 자기와의 싸움이다. ‘무엇이 나에게 옳은 일이지?‘하면서 순간적인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버텨야 한다.
섹파도 정리하고 썸남도 정리한 요즘_ 나는 혼자 있어보기로 결심했다. 그 동안 무서워서 빙글빙글 도망만다니던 ‘외로움‘이란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해보기로 했다. 이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남자란 동물에게 ‘여자로 보이는 쾌락’도 시들해졌다)
이혼의 반작용인 해방감을 미친듯이 즐기던 시기도 지났고, 또 상실로 인해 엉엉 울고 다니던 시기도 한 풀지났다. 그 모든 것이 섞여 울면서도 소개팅하고, 친구만나러 나가고, 남자를 골라 섹스를 하고, 미친듯이 책과 영상으로 도피하던 시기도 지난 것 같다.(언제 다시 이런 싸이클이 올 지 모르지만 ㅎㅎ)
그리고 나는 이제 그토록 무서워했던 외로움의 실체를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사 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집인데 자려고 누우면 그 고요함과 혼자됨이 다른 강도와 깊이로 느껴져서 참 낯설다. 혼자된 감각은 왜이리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인지…. 15년이란 세월은 정말 지독히도 내 모든 곳에 세겨져 잇는 것 같다. 사는 곳을 바꾸고, 머리를 자르고, 스타일을 바꿔도 한 부분은 계속해서 남아있다.
사랑의 본질은 합일감, 충만함이 아니라… 오히려 처절함과 고통을 견디는 것에 있지 않을까? 사랑은 아름다운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정반대로 아프고 또 아픈 끊임없이 하강하는 것인듯_
영화 ‘퀴어’를 보면서 외로움을 잘 단속하는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외로움이란 감정이 얼마나 강력한지, 얼마나 사람을 추락시킬 수 있는지를 명확히 봤다.
‘리‘가 결국 자신의 밑바닥을 마주했듯, 나 역시 외로움의 실체를 마주하려 한다. 아직 ‘유진’처럼 젊어서 버겁지만, 그래도 간다. 그 외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길로.
울면서라도 그 길을 가는 나는, 아프지만 가히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