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성, 그리고 모녀관계에 대한 두 편의 책을 읽었다. 하나는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이고 다른 책은 하재영의 '나는 결코 엄마가 없었다' 이다.
두 책에 나오는 여성, 어머니 캐릭터는 강하다. '피아노 치는 여자'의 어머니는 딸을 잡아먹는 여성 그 자체다. 남편을 일찍이 잃은 어머니는 딸(에리카)에게 의존하면서, 에리카를 자신의 지갑이자 노후보상책, 욕망을 이뤄주는 수단으로 다룬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피아노 선생이 된 딸은 자신의 월급으로 원피스 한 벌 조차 사지 못한다. 어머니의 욕망에 따라 노후에 가서 지내야 할 아파트가 있으므로.... 그걸 위해 자신의 돈, 시간, 노동력은 모두 다 통제된다. 그래서 에리카는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피아노 선생으로 길러져 무한정의 노동력을 제공중이다. 어머니는 이런 딸을 잃어서는 안되기에 그녀가 결혼을 하는 것도 반대한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에리카는 자신의 삶이라곤 하나도 없이 통째로 삼켜졌다.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잡아먹는 크로노스-아버지의 신화가 여기서는 어머니에 의해 실현된다. 이런 식의 통제와 감시, 언어적 물리적 히스테리 속에 자라난 에리카는 SM 성향을 모두 가진 사람이 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면도칼로 자신의 살을 떠 피를 흘리며 만족하는 마조히즘의 성향과 또 다른 사람들, 특히 자신보다 권력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사디즘의 성향을 모두 갖게 된 것이다.
책은 전반적으로 충격의 연속이다. 이렇게까지 인간의 SM적인 면을, 그 동시성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었던가?! 부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어머니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을 때, 그 폭주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똑바로 보여준다. 라캉에 의하면, 부권은 정확히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현실의 아버지의 여부가 아니라 "어머니-아이의 밀착 관계를 끊고 욕망을 '법'과 '언어'의 질서로 중개하는 상징기능을 한다.
즉, 우리에게 "아이 너는 나의 전부가 아니다. 욕망은 무한히 충족될 수 없다. 세상에는 규칙과 한계가 있다" 라며 자식에게 집착하는 욕망을 포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권이 부재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욕망의 분리가 실패한다. 즉 어머니의 욕망이 아이에게 직접 들이닥치게 된다. 어머니의 결핍, 억압된 욕망, 불안과 좌절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이럴 때 아이는 '자기 욕망'을 가질 수 없고, '타인의 욕망을 대신 살아주는 존재'가 된다.
내가 이랬다. 시어머니에게 남편의 자리를 빼앗긴 엄마는 자신의 불안과 권력욕을 아이에게 모두 전가한다. 그렇게 아이는 엄마의 이루어지지 삶을 대신 살아주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엄마란 거대한 존재 밑에서, 내쳐질까 불안해하면서도 또 칭찬을 갈구하며 오로지 '엄마'만 보고 살게된다.
이런 삶이 계속되면, 온갖 신경증이 나타나게 된다. 현실감각이 붕괴되고, 신체적으로도 여기저기 통증이 생기는 등 여러 증상이 발현된다. 나도 그랬다. 평생을 그것도 결혼을 한 뒤에도 '엄마의 욕망'에서 분리가 되지 못한 나는 조기폐경이란 증상까지 겪었다. 희안하게도 엄마와 멀어지니 매달 꼬박꼬박 생리를 한다.(요즘은 살도 찌고 컨디션이 좋다)
만일 이런 신체적 증상을 겪는데도 어머니로부터 분리가 되지 못했다면, 소설 속의 에리카처럼 된다. 면도칼로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 피를 뚝뚝 흘리는 가학적인 모습과 남들을 교묘하게 괴롭혀 그들의 고통을 보면서 쾌락을 느끼는 성불구가 되는 것이다.
에리카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부권이 들어와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 그만큼 어머니란 힘이 강력하기도 하고, 에리카가 길들여져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현실성을 가지면서도 비극적이다. 분리와 탈주의 시기를 놓치면 영원히 어머니의 딸이자 욕망을 이뤄주는 도구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3년전 나의 손은 엉망이었다. 손톱의 하얀부분까지 보이도록... 닳도록 뜯었다. 그렇게 손톱과 그 밑에 있는 살이 찢어져 피가 철철 나는데도, 그 손을 매일같이 쓰는데도 아픈 줄을 몰랐다. 그걸 뜯어서 피를 낼 때의 희열이 있었다. 불안이 올라올 때면 손톱을 뜯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에리카의 면도칼날질에 어느정도 공감을 했다.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이 아니면.. 내가 내 몸의 주체라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으니 말이다.
나의 엄마 미숙씨는 내가 임신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다. 돈뭉치를 들고와 시험관을 하라고 할 정도였다. 미숙씨는 나를 온전히 잡아먹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묶어둘 수단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대를 이어서 자신의 욕망이 전달되길 바랬던 듯 하다. 부권이 제어시키지 못하는 욕망은 이토록 강하고, 무서운 것이다.
미숙씨 스스로는 늘 희생하고 살았다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렇게 욕망이 가득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겠지만... 이게 더 폭력적으로 느껴지지만 말이다.
엄마의 딸로 사는 것이 전부라고, 그걸 이뤄줄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며 살던 희연은 죽었다. 퇴근하면 엄마와 통화하며 집으로 가는 것을 낙으로 삼던 희연도 죽었다. 이제 그런 희연은 없다.
조기폐경을 진단받았을 때, 현관문이 안열릴 때, 이사온 아파트의 샷시가 떨어졌을 때, 미추가 골절되어 절절맬 때, 너무도 혼자인 것 같을 때마다 엄마에게 안겨서 엉엉 울고 싶던 희연이 나왔다. 그런 유약하고도 엄마를 찾는 희연을.. 혼자 다그치기도 했다가 달래기도 하면서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다시 그 의존하던 관계로 돌아가지 않으려 정말 용을 싸며 버텼다. "안되. 희연아. 다시 그렇게 되면 안되. 혼자해야되. 할 수 있어" 라며 엄마를 찾는 희연을 키워내면서, 그렇게 부권의 언어를 스스로 발화하면서, 나는 엄마를 끊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 버티자, 나에게 매달리며 자식처럼 굴던 엄마가 그녀의 자리로 가는 듯하다. 나만 보면 할머니와 고모욕, 아버지 험담을 하던 엄마가 그걸 멈췄다.(내가 절대 안들어준다) 자기가 심심할 때마다 유툽에서 신부님 강론, 스님 말씀등등 좋다는 건 복사 붙여넣기 해 융단폭격처럼 카톡을 보내던 엄마가 그것도 멈췄다.
심지어 혼자사는 딸 집에 가보고싶다며, 아무때나 연락없이 찾아오던 엄마도 이제 오지 않는다. 내가 엄마의 그런 수법을 알아차리고 지긋이 버텼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식은 자식의 위치로, 부모는 부모의 위치로 가도록 어느정도 교통정리를 하니 이제 나에게 빈 틈이 생긴다. 더이상 '언제 어디서 부모가 쳐들어올 지 몰라'라며 불안하지 않다. 내가 더이상 무기력한 어린 아이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앞으로 절대로 엄마의 욕망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내 삶에 들어올 수 없다.
부권의 언어는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서 나온다.
(하재영의 책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챕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