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내 인생은 점점 ‘나’에게로 돌아오는 중이다. 내년에는 해외에 나가 나에게 쉼의 시간을 주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작년 이맘때를 돌이켜보면, 정말 휘몰아치는 한 해였다. 19호실을 찾아야만 했던 신체의 이상함과 조기폐경 증상. 정신분석을 받았고, 내가 직접 칼을 들어 잘라낸 이혼, 취업, 이사까지… 나는 밀려밀리면서도 능동성을 잃지 않은 채 멀리까지 왔다. 그렇게 나는 부모의 세계를 떠났고, 이젠 더 멀리멀리 가려고 해외 장기 체류를 준비 중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마음과 에너지의 움직임을, 부모는 어떤 식으로든 감지한 듯하다. 최근 아버지는 종종 “오늘 너 보러 갈까?”라고 불쑥 말한다. 갑작스러운 방문 제안은 애정 어린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너를 아직 통제할 수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너는 내 소유야.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 그 집도 내가 해준 거니까, 내가 원하면 언제든 보러갈 수 있어.’ 겉으로는 무언가를 갖다주겠다며 보고 싶다는 핑계지만, 그 속엔 여전히 드글드글 끓고 있는 아버지의 소유욕이 있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보고 싶다, 내가 보러 갈까?”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들은 그리움의 언어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떠나가지 마라’, ‘네가 멀어지는 걸 감지하고 있다’는 저항의 감정이 들어 있다. 나는 안다. 이건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정조대의 언어이며 감정적 통제의 반복이다. 나를 불러세우고, 마음의 끈을 당기며, 딸로서의 역할을 다하라는 무언의 요청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요청에 무력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이제는 ‘거기까지’라고 말할 수 있다. “아빠, 저도 제 일정이 있고 생활 리듬이 있어요. 미리 조율되지 않은 방문은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갑자기 오늘 간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이제 그만 해주세요. 제가 준비되어 있을 때, 서로 시간을 맞춰봐요.” 그렇게 말한다. 엄마에게는 더 단호하다. 그녀에게는 어떤 여지도 주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희연아, 너가 엄마랑 너무 멀어진 것 같아’라는 말에 며칠간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쓰는 감정의 전략인 것을 알기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내가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런 경계를 세울 수 있게 된 지금의 내 말과 행동이,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나는 지금, 떠나는 중이다. 하지만 이 떠남은 단절이 아니다. 나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결과다. 언젠가는 부모도 그것을 이해할 것이다. 언젠가는. 하지만 그 ‘언젠가’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한다.
칼을 차고, 방해하는 것들을 잘라내며—
나는 나의 삶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