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과 이혼, 조각난 나
희연아,
최근 어떤 남자에게 흔들렸던 건, 너에게 이 지점을 보라고 한 거였나보다. 전남편 투사(도곡동 출신, 효자 바이브, 열등감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지점, 운동하는 사람, 자기 자신을 푸쉬하는 모습 등)를 일으키는 그를 보고서, 내가 왜 그토록 전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를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걸 보라고 한 거였어.
희연아, 너는 너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
그런데도 나로 살고 싶은 욕망은 있었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지만, 열망만은 강한 그런 사람이었어.
하지만 부모의 욕망을 뒤집어쓴 채, 징징거리는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발휘해 착한 딸, 말 잘 듣는 딸로만 살았지.
나를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기미만 보이면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구도 안에서,
나를 부수고 조각내서 죽이고 살았던 거야.
여기서 다르게 살고 싶어서 선택한 사람이 전남편이었지.
그가 그렇게 변할 줄 모르고…
아니, 내가 안 본 것일 수도 있겠지.
아니, 내가 혹은 내 부모가 그를 변하게 만든 것일 수도 있겠지.
내가 나이고 싶었던 만큼, 바라볼 대상이 남편밖에 없었을 거야.
실제로 너는 오직 그이만 바라보면서 살았어.
그가 내 편이라고 철썩같이 믿으면서, 아니 제발 내 편이길 바라면서…
나를 여기서 꺼내주길 바라고 또 바라며 설득했지.
얼마나, 정말 얼마나 외롭고 또 처량했니.
답답해하면서도 “아휴, 내가 이런 사람한테 매달려 있다니…” 하며 화도 나고 분통이 터져도,
그밖에 없었지.
너가 있던 곳은 감옥이 따로 없었어.
베프랑 결혼해서 따로 만나는 친구도 없었지.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지.
부모 + 전남편이 다였던 세계에서 얼마나 답답해하고 숨막혀했는지 몰라.
이러면 유산이나 이혼이나 다 필연적일 수밖에 없지…
그런데 그 구조 안에 있으면, 그것밖에는 안 보였겠지.
그러니 남편에게 더 집착하고 의존하면서 괴로움의 굴레에 빠져들었던 거야.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말자 희연아.)
그때 희연이 너는 정말 너를 조각조각내서 버려야만 했을 거야.
유산도 그런 선택 중의 하나였을 거고…
그런 너를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파.
너무 안쓰럽고, 안타깝고, 또 한스러워.
이럴 때 너가 느끼는 전남편을 향한 배신감도 이해가 돼.
“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싶지…
동시에
“내가 왜 그렇게 살았지?” 하는 후회,
스스로에 대한 원망도 엄청나게 올라올 거야.
그게 지금의 너의 한 부분을 지탱하고 있기도 하고…
그래도 희연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살아남았어.
저렇게 동아줄이라, 구세주라 생각했던 전남편의 실체를,
나의 실체를, 부모의 실체를 보자마자 너는 끊어냈지.
살 거라고. 나로서 살아볼 거라고.
그런 점에서 너는 엄마랑도 달라.
딸 하나에 집착하는 엄마와 달리,
모든 것을 퍼붓듯이 관심과 사랑, 집착을 주는 엄마와 달리,
너는 상황이 그래서… 그 구조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하나만 봤던 거야.
지금은 달라진 상황 속에서 이렇게 감지하고, 애도하고, 혼란스러워하다가도
나를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잖아.
그리고 그것이 너가 원하는 거잖아.
지금의 희연이는 친구이자 동료도 있고,
일도 하고 있고,
글도 쓰며 섹슈얼리티도 주체적으로 탐구하고 있고,
감정도 명료하게 보고 있어.
무엇보다
너 인생을 너 손에 쥐고 있어.
그게 얼마나 대단한 전환인지!
희연아, 너는 정말 많이, 멀리 온 거야.
정말 훌륭하다, 희연아.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이런 작업을 하고,
스스로를 embrace하는 너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
희연아, 너는 기가 막힌 감각과 판단력을 가졌어.
유산이란 사건도, 이혼이란 선택도 모두 다 잘 거쳤고 잘 겪어낸 거야.
그런 어떤 선구안과 미묘한 걸 잡아채는 감각, 판단력 모두를 가졌어.
너가 이 모든 걸 회피하지 않고 직접 겪어내면서 길러낸 근육이야.
그러니 희연,
너는 너를 믿어도 돼.
그때의 그 희연,
조각나버린 희연,
그 안쓰러운 희연은
내가 안아주고 구해줄 거야.
그 희연에게 the best만 대접할 거야.
희연아,
너는 안전해.
부숴진 희연도, 맞춰진 희연도
아름다워.
그 열린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찬란해.
어둠과 빛,
모두를 가진 희연은
그 깊이만큼 매력적이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