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내라던 세계를 떠나, 수용의 세계로 온 나

의존의 계보 2

by Tess

요즘 전남편과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생각난다. 한 번 물꼬가 터져서 그런가, 줄줄이 사탕처럼 떠오른다. 23살, 러시아에서 만난 그는 "내가 공부를 안해서, 러시아란 땅으로 유학을 와 이 고생을 하는거야. 벌받는거야" 라는 말을 자주했다. 자기는 벌받는 마음으로 살고있다고....


그땐 저 모습이 뭔가 어른스러워보이면서도 짠했다. 이 척박한 땅에서 혼자 공부하고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다보면 저렇게 정신승리까지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 뒤로도 저런 말을 많이 들었다. '이겨내야지.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더 해야지' 라며 자신의 부족함으로 원인을 돌리고, 노오력을 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모토였다.

그런 그 옆에서 나도 알게모르게 영향을 받았나보다.


나는 타고난 성향도 '내 탓이오'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 저런 남편까지 만나니... '내가 잘못했어, 나에게 원인이 있어'하는 습이 굳어졌다. 그래서 내가 유산 후에 그렇게 방황한 것 같다. 가족 중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너 탓이 아니야.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고 말해주지 않아서.... 은연중에 모두들 '너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이 발생하니'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전남편은 소파술을 하고 집에 와 요양하는 나에게 "희연아 너 임신된다. 다시 시도해보자"라는 말까지 했었다.

내가 어떤 좌절과 절망을 겪는지... 유산이, 죽음이 어떤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서 내 탓만 하고 살았다.


전남편의 저 말_ "이겨내야지. 노력해야지" 라는 건, 아버지의 언어와 매우 닮았다. 나쁜 결과를 받으면 "내가 부족해서 이렇게 된거야" 라면서 자신에게 원인을 돌리는 것_ 그렇게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아빠가 나에게 강요한 자신의 삶의 방식이다.

이게 대한민국 남자들의 특징인지,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자신의 부족함이 보이면, 저렇게 '내가 더 열심히 하면!!!'이라며 채찍을 드는 것 같다. 혹은 사회, 구조+ 남의 탓을 하던가...


나는 이렇게 아버지의 언어를 재생산하는 남편과 살았다. 지금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아빠를 피해서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예카테린부르크로 도망친 나였는데, 거기서 만난 남자가 아빠와 정신세계가 똑같다니!!! 이렇게 도피의 끝이 결국 아버지였다는 패턴은 나만의 특수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남자 둘은(아버지와 전남편) 자신의 불안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더 해라. 될 때까지 해라. 이겨내라'라는 강요와 압박의 언어들_

취약함, 아픔, 슬픔을 드러내면 안되는 환경_

저런 감정들에 공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시들고 또 시들어갔던 것 같다. 아버지의 언어를 다른 남자의 얼굴로 들으면서... 나의 조각들을 버리고 버리며 살았다.


그리고 저런 세계를 떠난 지 1년이 넘었다. 그 동안의 나는 문제가 있을때마다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나를 어떻게 좀 해줘'라고 대응했다. 이것은 엄마의 방식과 닮았다. "내가 이만큼 하니까, 너는 응당 나를 책임져야해!"라면서, 과잉애정을 쏟아붓고는 그 댓가를 요구하는 것 말이다. 상대방이 그걸 원하는지 아닌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면서...


그 1년간 나는 보려고 참 노력했던 것 같다. 이것이 어디에서 오고, 누구의 언어이며 그래서 내 모습이 어떠한지... 정말 부던히 파고 또 파며 똑바로 보려고했다. 즉 직면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런 나를 받아줘!'하면서 안전을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번의 유산, 이혼, 독립, 그 사이에 말도 없이 많은 사건을 겪은 게 나야.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있겠어?'라며 내보인다. 내 의존의 방향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바뀌었다.


그래서일까? 이젠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내가 보인다. "부모배경없는 희연은 싫다고 한 전남편, 너 빠져"한 뒤, 나는 부모님과 맞다이를 뜨고 있다. ㅎㅎㅎ 거리를 두고, '이건 제 공간입니다 들어오지마세요' 라고 말을 하고 행동을 취한다. 여기에 아버지가 돈과 권력을 휘둘러 나를 막아서려해도 개인적으로 실망은 해도, 대응하지 않는다. 이게 내가 부모님을 재교육하는 방법이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알려주는 것_


사실 내 독립은 이혼 전부터 시작이었다. 그것이 이혼으로 주춤했다가, 이혼 후 밀려밀려 여기서 온 것이지만... 그걸 수행한 건 나 혼자였다. 그런 힘이 이미 나에게 있었다.

샴쌍둥이처럼 부모와 또 전남편과 붙어있던 나에겐 수도 없이 많은 순간이 위기였다. 전화해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리고 위로받고 싶은 날이 정말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 고비를 정말 오체투지하듯 기어가며 넘어섰고, 드디어 나는 분리된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의 보호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나만의 경계를 세우고 내 세상을 구축해나가는 내가 보인다. 내가 하고있다. 앞으로 내가 하는 사랑은 의탁이나 의존, 희생이 아니라 '공존'이 될 것이다. 다행히 그런 방향으로 가고있다.^^

드디어 앞으로의 삶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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