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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달한커피 Jul 28. 2020

할말을 못하고 청국장만 먹고 와야 했다

철 없는 딸년의 때 늦은 후회

오랜 병을 앓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정엄마는 혼자가 되었다. 한번 손상된 간은 좋아지지 않고, 오랫동안 아프셨으니 어쩜 먼저 떠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많이 허탈해 했고, 자주 눈물도 보였다. 처음엔 혼자 된 엄마가 안쓰러워 자주 찾아 갔지만, 맞벌이에 시어머님과 같이 사니 차츰 찾아가는 횟수가 멀어졌다. 언니에게는 '맏이니까.'하며 책임을 떠 넘기고, 남동생에게는 '장손이니까.'하는 굴레만 주고 나몰라라 했다. 아니 '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사는 줄 알아?'하고 투정을 부렸다. 이건 아빠가 살아계실때나, 돌아가셨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친정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후부터 식당에 다녔다. 자식들은 좀더 편하고, 덜 힘든 일을 하길 바랬지만, 50대인 아줌마 아니 벌써 할머니가 된 여자에게 주어진 일은 주방의 설거지였다. 엄마가 다니는 식당은 인근 다른 지역에까지 소문이 난 청국장집이었다. 방송에도 나오고, 맛있다는 소문이 나서 밥때가 되면 2층의 넓은 규모의 식당이 금새 꽉 찬다고 했다. 특히 청국장도 그렇고, 겉절이도 인기가 있어서 손님들이 사가지고 갈정도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아, 무거운 뚝배기를 씻는데 손목이 자주 아프다고 했다. 그런 엄마에게 "그래도 혼자있는 것 보다 시간도 잘 가고, 돈도 벌고 좋잖아"라고 했다.

엄마는 재밌다고 했다. 같이 일하는 아줌마도 잘해주고, 사장도 인품이 좋아 혼자된 엄마에게 음식도 건네줬다. 엄마는 그 즈음 자주 '주방 실장'에 대해 얘기했다.

"주방에 실장이 있는데 오늘은 그 사람이 국수를 말아 줬어."

"내가 전에 말한 주방 실장이 50대인데 혼자 산대."

워낙 손맛이 좋아, 인기가 좋은 겉절이 김치와 밑반찬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그분이 혼자 산다는 것, 자신보다 두살이 많다는 것, 친절하다는 것 등을 얘기했다. 처음에는 '좋은 분들을 만나 즐겁게 일하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난 그 소리가 듣기 싫어졌다. 남편이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무리 작장 동료라지만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게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 돌아가실 땐 못 살것처럼 울었지만 속으로는 오랜 지병에 지쳤는데 홀가분해졌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난히 작은 딸을 예뻐해주던 아버지가 생각나 속이 상했다. 언니에게 하소연을 해봐도 돌아오는 건 "그동안 병간호에 실질적 가장 역할에 힘들었는데 즐겁게 사는게 뭐가 어떠니?"였다. 언니의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아빠의 사진을 들여다 보면 묘한 감정이 생겼다.


오랜만의 통화에서 엄마는 치아가 부실하다며 치과에 다닌다고 했다. 그 말이 젊어지고 싶다는 소리로 들렸다.

"엄마, 벌써 할머니가 되었고 나이도 그렇게 많은데 치과에 너무 자주 가는거 아니에요? 예전엔 그런 소리 안하더니 더 젊어져서 뭐 하려고?"

"... 그런가"

"어 그래, 그리고 난 노인들이 황혼에 남자를 만나고 그런 것도 싫더라. 자식 부끄럽지도 않나? 주책이지 뭐야. 엄마는 안 그럴거지?"

전화를 끊으며 '이 정도면 눈치를 챘겠지. 다신 실장인가 뭔가 얘기를 안 하겠지' 했다. 그때 엄마가 어떤 반응이었는지, 맞장구를 쳤는지, 다른 화제로 넘어갔는지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건 그 이후로 실장에 대한 어떤 얘기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폐암 말기'판정을 받아 식당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때  아프다는 말을 많이했다. 감기가 떨어지지 않아 동네병원을 겨울 내내 다녔고, 어깨와 등이 아파 쉬는 날은 하루종일 누워있다고 했다. 난 그때마다 "나이들면 아픈게 당연하지. 우리 시어머님도 맨날 아프대. 가스비 아낀다고 춥게 지내지 말고, 팍팍 틀어. 아프면 자식들 고생 시킨다는 거 잘 알잖아."라고 말하는게 전부였다. 오랜 감기에 기침소리가 심상치 않다며 동네 병원에서 큰 병원을 가보라고 했고, 미루고 미루다가 간 병원에서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떨리는 마음에 달려간 병원에서 의사는 자식들을 보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고통이 있었을 텐데요. 너무 참으셨네요."

"수술 시켜 주세요."

"암이 온 몸에 퍼져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길어야 육개월 입니다."

엄마가 그렇게 겨울내내 아프다고 했을때는 '나이들면 누구나 아픈거'라고, 엄살이라는 듯 넘긴 내 말들을 주어 담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암덩어리가 온몸에 퍼져 어깨와 허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난 나이들면 아픈거라고 했으니... 참 한심한 딸년이었다. 이렇게 일찍, 허무하게 우리 곁을 떠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좋은 분과 새 출발하라고 말할 걸 그랬다.  여자인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슴에 못 박는 얘기나 쏘아 붙일때 엄마는 어땠을까. 아마 나 때문에 병이 더 깊어 졌는지 모른다는 자책을 오랫동안 했다.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얼마전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으며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 50대 후반이면 한창인데, 치아도 새로 해줄걸... 어금니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씹는 게 부실해져, 고기도 마음대로 못 먹은 엄마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후 그 식당을 찾아 갔었다. 워낙 친했던 분들이고, 병원에 누워서도 몇번이나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전화가 왔다며 엄마가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들의 응원에 힘을 내어 죽을 먹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인데도 식당안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구수하고 꼬릿하고 익숙한 청국장 끓이는 냄새가 가득했다. 빈속이라 입에 침이 돌았다. 청국장을 시키고 주방쪽을 살펴보았다. 설겆이 하는 사람, 음식 담는 사람, 주방 실장으로 보이는 아저씨도 있었다. 저 뜨거운 열기 속에서, 무거운 뚝배기를 하루에도 수백그릇 닦았을 엄마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삼십년을 함께 했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외로움과 슬픔을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나누며 그나마 웃을 수있었던 주방의 구석, 개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청국장은 맛있었다. 그리고 겉절이도 배추의 아삭함과 적당히 매워 청국장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난 음식을 다 먹고, 계산을 하고 나올때까지 엄마의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그냥 잘 지내겠지 하는 그들의 바람을 지켜주고 싶었던 걸까. 아님 '내가 못난 둘째딸이에요' 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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