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병원 307호의 풍경
김 할머니 니나노 노노래 할머니사랑꾼에 짜이찌엔을 가르치던 요양보호사까지
어머님이 요양병원으로 옮겼을 때 307호에 있었다. 7개의 침대 중 어르신들은 6개를, 한 개는 간병인 침대였다. 처음에 모셔 놓고 들어설 때는 발이 떨어지지 않던 마음은 시간이 지나니 차츰 적응이 되었다. 자식들이 몇 명이지만 어머님을 집에서 모시지 못하고 그곳에 버려두는 죄스런 마음은 옅어지고, 잘 지내는 모습에 안심을 했다. 지금은 병실을 바꿨지만 처음에 있던 307호의 풍경은 지금도 기억이 많이 난다. 중국 교포 간병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요양병원은 처음이라 서툴고 낯설어하는 마음을 알아주고, 걱정하는 자식들을 이해해주며 알뜰하게 어머님을 챙겨줬다. 마른 체구인데 늘 부지런하고 병실의 어른들에게 말도 시키고, 늘 청결한 상태를 유지한다. 오히려 자식들이 '좀 쉬어가면서 하시라'고 말할 정도다. 어느 날 어머님을 뵈러 갔을 때는 중국어로 인사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언어를 배우는 게 치매에도 좋다고 했고, 어르신들은 "짜이찌엔"하며 자식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서 얼마나 웃었던지 모른다. 나중에 고향으로 건너가셔야 한다며 간병인을 그만두신다고 했을 때 얼마나 서운하던지.
요양병원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방문을 했다. (이 코로나 사태가 휩쓰기 전에는 말이다.) 요양 병실의 어르신들과도 금방 친해져서 서로 안부도 주고받고 간식도 나눠 드린다. 어머님의 맞은편에는 언제나 유쾌하신 할머니의 침대가 있다. 자식들이 가면 늘 손을 잡아 주시며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어머님의 상태를 먼저 알려주신다. 요양병원은 치매나 심각한 병으로 일체 움직임을 못하는 분들도 있지만 한 병실의 두 명 정도는 활동이 자유로운 분도 있었다. 그 할머니는 노래 할머니로 통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니나노~"하는 민요부터 "건넌 마을에 최진사댁에~"하며 흘러간 옛 가요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박수를 유도하고 힘껏 박수를 치면 또 앙코르곡을 부른다. 하지만 이때쯤 다른 침대에서 "맨날 그 노래 타령 좀 그만해라"는 다른 노인의 한 소릴 듣고 그만 멈춘다.
문 옆의 할머니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건강하셨다. 사실 식사도 잘하고 운동도 하루에 한 번 했지만 치매가 있었다. 하루는 요양보호사가 어머님의 손톱깎이와 양말이 없어졌다고 해서 다시 사다 드렸다. 알고 보니 그 치매 할머니가 가져가서 자신의 사물함에 넣어 둔 거였다. 가끔 마음에 드는 간식을 어느 틈에 가져가 드시거나, 예쁜 담요를 자신의 것이라 우길 때는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일들이 한번 웃고 넘어갈 소소한 일상이다. 그 옆의 그 방의 최고령 90세의 할머니는 깔끔하다. 밥 먹을 때 조금이라도 흘리는 것을 싫어하고, 주변 정리 정돈에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요양보호사도 고개를 절레 흔들며 "자신의 침대는 물론 다른 노인들에게도 잔소리를 많이 해 피곤하다."라고 말한다.
창가의 할머니에게는 우리끼리 부르는 별명이 있다. 바로 '사랑꾼'이다. 남편분이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살고 있는데, 하루에도 열 번 넘게 통화를 한다. '밥은 먹었냐, 씻었냐, 막걸리 많이 마시지 마라' 당부하시고 끊을 때는 '사랑한다'로 말한다. 당뇨와 고혈압 등의 많은 합병증을 앓고 있어 평상시 잘 지내다가도 언제 큰일이 생길지 몰라서 요양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자주 집으로 외출하셔서 남편분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며칠은 기분이 좋은 상태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연락이 안 될 때는 불안해서 "노인정에서 다른 할망구랑 놀러 간 것 같다"며 불안해하며, 질투가 심하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말하면 버릇없다고 혼날까.
또 한 명의 할머니는 일명 '김 할머니'다. 세상에서 김을 제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끼니때마다 김이 없으면 밥을 안 드신다. 김 선물을 제일 좋아하면서도 자식들이 김을 사 오면 "왜 쓸데없이 이런 걸 사 왔냐."라고 투정을 부인다. 감기에 걸렸을 때 입맛을 잃어 김에 아무리 밥을 싸 드려도 입을 벌리지 않아 모두들 걱정을 했다. 어느 날 남편 혼자서 요양병원에 어머님을 뵙고 온 날이 있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어머님께 무슨 일이 생겼나 덜컥 걱정이었다.
"김 할머니가 돌아가셨데." 남편이 기운이 빠져서 말했다. 감기에 걸렸는데 좀처럼 낫지 않더니, 어느 날 침대가 비어있어서 물어봤다. 감기가 심해져 다른 어르신들께 옮길 수 있어 혼자 쓰시는 방으로 바꿨다는 소식에 궁금했는데 결국에는 얼마 후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어머님에게 닥친 일도 아닌데 안 좋았다. 가끔 조미김이 식탁에 오를 때는, 자신의 침대 위 식판대에 올려진 반찬을 휙 둘러보고는 어느새 조미김 한 봉지를 꺼내어 흰밥에 싸 드시던 그 모습이 생각이 앗다.
각자 모두들 적게는 70에서 90 평생을 가족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사셨을 텐데 말년에 요양병원에 약한 모습으로 들어와 계시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아니 그동안 열심히 사셨으니 이제는 요양원에서 서로 의지하며 옛이야기를 나누며 편한 마지막을 보내는 것일까. 어머님은 이때만 해도 혼자서 밥도 드셨다. 자주 밥을 입으로 가져가는 순서를 잊어버리고, 동치미 국물에 손을 담가 장난을 치고, 밥과 국 등 모든 반찬을 섞어 놓을 때가 있었지만 스스로 밥 한 숟가락을 떠 드실 때는 잘한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간식으로 바나나와 단팥빵, 요플레를 좋아했다. 늘 가면 치매로 정신이 뚜렷하지 않을 때도 자식들의 손을 쳐다봤다. 그럼 일부러 큰소리로 "어머님 간식 사 왔어요. 바나나는 하나씩 친구분들 나눠 줄게요. 대신 이 맛있는 단팥빵은 어머님만 드세요." 했다. 알아들었는지 "그럼 그럼."대답을 했다.
몇 달 후 어머님은 콧줄을 연결했다. 일 년 넘게 누워서만 생활하시고 치매가 더 심해져서 그런지 씹는 법도 자꾸 잊는지 그냥 삼켜서 큰 일 날뻔했다. 자꾸 기도가 아닌 식도로 음식이 넘어가 위험에 빠질 뻔 한 뒤로, 병원에서는 콧줄을 권했다. 콧줄은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한번 콧줄을 끼면 입으로 다시 음식물을 섭취하는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입으로 음식물 섭취를 할 수 없으니 콧줄로 영양식을 넣는 게 더 낫다고 했다. 자꾸 마르니 영양소 골고루 있는 파우더도 넣어주고, 경관식 콧줄 식사를 결정했다. 하루 4번 영양식을 넣고 있다. 다시 입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입으로 음식을 섭취하는 일이 이렇게 큰 상징을 가질 줄 몰랐다. 남편도 늘 어머님 간식을 챙기는 재미도 있었는데 이젠 그 마저 없어지니 더 환자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아파트 후문에 있는 빵집의 단팥빵은 어머님이 제일 좋아하던 빵이다. 꽈배기도 좋아하는데 팥이 잔뜩 들어간 단팥빵이 밥보다 좋다고 했다. 어머님이 기다리는 줄 알면서도 회식이나 모임으로 밖에서 맛있는 걸 먹고 늦게 들어갈 때면,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단팥빵을 두 개 사갔다. 어머님 방문을 열고 인사와 함께 빵 봉지를 먼저 내밀면, 얼굴이 환해지고는 했다. 콧줄을 빼고 단팥빵을 다시 입으로 드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