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마디를 더 시켜보던 의사는 ‘간성혼수’라 했다. 간경화 말기에 자주 나타나는 일로 간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암모니아 수치가 높아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는 증상이라 했다. 관장을 해서 수치를 낮추어야 한다고 했다.
약을 투여하면 기다릴 것도 없이 변을 쏟아 낸다. 엄마의 타박이 이어졌다.
“힘을 좀 주고 모았다가 한꺼번에 싸라니까. 어이구 내 팔자야 언제 이 고생이 끝나려나”
혀를 차면서도 부지런히 뒤치다꺼리를 한다. 기저귀를 대주고 지저분해진 몸을 닦았다. 병원을 들락거리는 세월이 오래되니 병간호는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 되었고, 얼마나 지쳤는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거친 말들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지만 어설픈 나의 짐작은 틀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언젠가 엄마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같은 병실의 환자 보호자와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무지 사랑하나 봐. 부부끼리 있을 때는 얼마나 다정하게 부르는지, 신혼 때 얘기도, 자식들 얘기도 해주면서 얼른 정신 차리라고 손을 잡고 계시더라고”했다.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일까,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우는 모습에 혹시 아버지를 향한 원망의 소리를 털어놓을까 하는 걱정에서 일까. 엄마는 자식들이 병원을 찾아오면 일부러 더 심하게 아버지를 대했으리라.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엄마, 아버지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러지 마요. 정신이 없다고 해도 다 들려”하며 아버지 편을 들었다.
관장은 환자도 보호자도 참 지치게 했다. 정신이 없고 축 처진 몸을 옆으로, 다시 반대편으로 돌려야 하고, 허리와 엉덩이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때 내가 있을 때만이라도 엄마를 도와 주려 이불을 들추기만 해도 아버지의 몸이 굳어진다. ‘싫어, 아냐’를 반복하며 내 손길을 거부하셨다. 엄마보다 이십 킬로는 더 나가는 몸무게였는데도 모두 엄마의 차지였다. 아마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게 있으셨나 보다.
관장을 몇 차례 하고 나면 질문이 이어졌다.
“나 누구야”
“마누라지 누구야, 벌써 노망 났어?”
아버지는 오히려 엄마를 흘겨본다. 그럼 엄마의 말이 이어진다.
“니 아부지 이번에도 살아 났다. 한고비 넘겼다. 언능 가서 황서방 밥해줘라”
나도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는 누구야”
“둘째 딸”
“나 결혼한 거 알아?”
“그럼 알지, 근데 애는 낳았니?”
아직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나 벌써 네 살인 손자를 기억 못 했다. 아마 둘째 딸이 결혼하고 한동안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던 일은 기억을 하나보다. 그럼 나는 ‘건강한 아들 낳았어, 얼른 퇴원해서 보러 가자’라고 말을 했다.
벌써 십 년 하고도 오 년 전의 일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아프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아버지가 ‘김 병장님’을 찾던 병실이 꿈에 나타난다. 기저귀를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내가 보인다. 가족의 버팀목이자 든든한 기둥이었던, 결코 힘없는 모습으로 병실 침대에 누워 기저귀 차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을 아버지의 마음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