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달한커피 Aug 25. 2019

삭제하시겠습니까?

진짜 가짜를 가려내어 신중히 삭제하는 일


오랜만에 이메일을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광고 메일이 수 백 통 쌓여 있다. 동안시술로 십년을 젊게 보일 수 있다는 성형 메일, 한 번의 투자로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분양 메일이다. 세일을 알리는 대형 쇼핑몰 메일에 죽을때까지 병원비 한 푼 들지 않는다는 보험 메일도 있다.

 내 개인정보를 어떻게 다 알고 메일을 보냈는지 궁금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유혹적이었다. 가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나이라는 걸 아는데 어려보이는 TV속 연예인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혹시 나도 가능할까? 성형외과나 피부과에 견적이나 내볼까 하는 아주 잠깐의 흔들림이 생긴다. 하지만 처진 눈과 주름, 납작한 코와 탄력을 잃은 피부까지 어마어마한 비용이 나올 거라는 걸 알기에 포기했다.

 또, 새로 지어진다는 비싸기로 소문난 영어브랜드의 아파트와 요즘 뜨고 있다는 오피스텔 분양 광고를 봤다. 퇴직 후 생활자금이 걱정되는 우리 부부에게 필요할 것 같지만 지금 당장 생활비도 빠듯한데 미래를 위한 투자는 언감생심이다. 각종 생필품을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할인을 한다고 유혹하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쇼핑하다보면 늘 과한 지출을 하게 되는 인터넷 대형 쇼핑몰의 상술에 이젠 속지 않아야지. 제일 유혹적이고 빠져 드는 것은 병원비 보장 보험이다. 지금도 병원비로 꾸준히 적지 않은 돈을 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해진 급여에 지금 들어가는 보험도 만만치 않으니 생활비를 쪼개 보험을 든다는 건 무리다.


 모니터를 들여다 보며 메일을 전부 클릭해 삭제 버튼을 눌렀다. ‘삭제 하시겠습니까?’하는 확인 글이 뜬다. 얼른 삭제 버튼을 눌렀다. 아마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소비에 약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정보를 가장한 유혹적인 메일은 내일부터 또 가득하겠지만 말이다. 사실 의지가 약하고 팔랑귀로 소문난 나부터 삭제버튼을 누르기 전에 두 번이나 망설였다.

 ‘삭제 하시겠습니까’하는 물음에 혹시 내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조리 지워버려 나중에 후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깐 했다. 오래전 중요한 메일을 광고 메일과 함께 삭제해 곤란한 상황을 겪은 적도 있고, 핸드폰의 문자와 사진을 정리한다고 지웠다가 증명할 길이 없어 답답했던 적도 있었다.

 삭제하고 지우고 비우는 일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 내 인생의 그런 순간들이 자꾸 떠올라 괴로울때도 있다. 오래전 짝사랑하던 동네 오빠 앞에서 넘어져 치마가 뒤집어 졌던 기억은 또렷하다.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던 교회 오빠에게 고백했더니 당황해하며 ‘니 친구를 좋아해서 너한테 잘해줬다’는 말을 들었던 그 상황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런 기억들을 삭제하고 싶은 적이 여러번이다.


 이런 일은 애교에 불과할지 모른다. 임대보증금을 받지 못하고 나와야 했을 때는 몇 년 전 전세계약서를 쓰던 그때를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오래전 폐암으로 돌아가신 친정 엄마를 생각하면 단순 감기인줄 알고 방치했던 기억을 지우고, 그때로 돌아가 병원으로 모셔가 진단을 받게 하는 새 기억을 심고 싶을때도 많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삭제와 지우기’ 때문에 괴롭고 힘들고, 울고 웃고 행복하다.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치매로 이제는 자식도 잘 알아보지 못한다. 잊고 싶은 기억이 많은 걸까. 나이도, 고향도, 제일 좋아하던 전국노래자랑의 송해 아저씨도 알지 못한다. 파전에 막걸리를 한잔 드신 날에는 꼭 나왔던 레파토리가 있다. “열다섯 살에 시집에 먹을 게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향의 뒷산에는 봄이면 철쭉이 지천이었지. 나물 캐러 갔다가 꽃을 한 아름 꺾어다가...” 이런 옛날이야기가 그리워진다. 힘들고 고생했던 기억은 잊고 행복했던 기억과 가족들은 영원히 머릿속에서 삭제하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랄뿐이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당신은 삭제하고 싶은 기억이 있어?”

  “당신과 첫 영화보던 그때? 순간의 판단을 잘못해 지금까지 이십년 동안 당신에게 코 꿰어 살고 있잖아”

  “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거든. 앞으로 당신 밥은 직접 차려 먹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콧줄과 홍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