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은 기관을 통하여 듣지만 6살에 헤어진 어린 아들을 20살의 장성한 청년의 모습으로 마주하게 된 이 엄마의 마음은 뭐라고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심정으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죄 많고 미안한 엄마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아들과 마주해야 했을까요.
새터민들은 한국에 입국하면 국가기관에서 조사를 마친 다음 북한이탈주민이라고 확인되면 정착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 기관에서는 정착에 필요한 교육을 받게 되지요.
그리고 먼저 탈북한 가족이 한국에 있는 경우 기관에서 정해준 날자에 면회도 가능합니다. 면회는 건물 밖에 준비된 별도의 장소에서 진행되지만 미리 신청하고 가족임이 확인되면 면회가 승인되는 거죠.
저도 그렇게 아들과 첫 상봉을 하게 되었습니다.
20살의 내 아들은 어떤 모습일까. 엄마 마음속의 아들의 모습은 14년 전의 6살 어린아이로만 간직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기억은 그 시절에 멈춰져 있는 것입니다.
면회장 밖에서 서성서성 초조하게 건물 위쪽만 바라봅니다. 그날은 그해의 첫날 1월 1일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온몸이 오돌오돌 떨려왔지만 커피 한잔 제대로 마실 수 없을 만큼 긴장되어 있습니다. 아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을지 보다 아들이 이 엄마를 어떻게 맞아줄지가 더 신경 쓰였다고 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드디어. 순서가 되어 이름이 불리고 멀리서 웬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오네요.
어머, 저의 친정아버지가 걸어오시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외할아버지를 닮은, 아니 저를 꼭 빼닮은 모습입니다. 14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누가 봐도 딱~ 내 아들인 듯합니다.
50미터, 30미터, 10미터, 5미터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만큼 가까워지는 이 거리를 엄마와 아들은 서로 14년을 기다려왔네요. 어색한 숨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향해져 있는 눈빛을 의식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아들의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아니 쳐다보고 싶었지만 결국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엄마는 아들을 품에 안았고 맞댄 가슴으로 전해지는 아들 내면의 미세한 떨림을 느낍니다. 아... 이 순간 뭐가 더 필요할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요리를 할 줄 모릅니다. 아니, 주방 안에서의 재능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날은 아들을 위해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1도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면 아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램을 가지고 정성 들여 장을 보고, 밤새워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6살에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도 원망스러울 텐데. 춥고 배고픈 그 모든 과정들을 고스란히 살아낸 아들의 그 고달프고 아픈 세월을 마음으로 보듬으며 눈물을 씹어 삼키며 소박한 점심 한 끼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도시락을 가운데 놓고 엄마와 아들은 14년 만에 한 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수없이 생각해 보고 반복하여 읊조리던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이 순간,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답니다.
그래도 나는 엄마였기에 이 적막을 깨야 했습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스스로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의식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인 내가 무슨 말인들 먼저 해야 했습니다.
이런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제가 아들에게 했던 첫 번째 말은 뭐였을까요. 나한테 아들은 14년 전의 그날, 6살의 어린아이로 남아있으니 그동안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수없이 혼자 시뮬레이션해봤던 그 말입니다.
첫 만남의 첫 숟가락으로 내가 직접 아들의 입에 밥을 떠 먹여주고 싶다고요.
고맙게도 아들은 허락해 주었고 저는 6살의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던 엄마의 마음으로 밥과 반찬을 고이 담아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엄마 앞으로 허리를 숙이며 아들은 엄마가 먹여주는 첫 밥숟가락을 받아주었습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갑니다.
그러고는~~ 그러고는~~
입안의 밥을 씹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아들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엄마와 아들은 밥 한 숟가락에 14년 동안 참고 참았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냈습니다. 어떤 설명,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가요? 쏟아낸 눈물이 우리의 대화였습니다.
다시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대한민국에서의 모든 정착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아들이 온전히 엄마 곁으로 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야말로 진정한 첫 만남과 다름없는 첫날을 함께 보내게 됩니다.
이제 한 가족으로서 이곳에서 함께 어우러져 울고 웃으며 살아야 합니다. 살아내야 합니다. 아쉬움과 원망이 어우러졌던 고통의 기억들을 씻어내야 합니다.
그동안의 긴 세월이 너무 고통스러워 앞으로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엄마였기에 엄마로서 아들을 품어야 했고 아들이 나를 엄마로 대하고 이 집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도록 14년간의 공백을 어떤 방법으로든 좁히고 메워야 했습니다. 그것이 엄마인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14년의 지난 세월에 대한 책임이기도 했고 다시 함께 하게 된 미래의 시간들에 대한 의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지난 시간들을 함 추려 함께 이겨낼 수 있어야 했기에 다시 한번 아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청했습니다.
"엄마는 아들한테 한없이 미안하고, 할 말도 많지만 하나의 청만 더 들어주면 안 될까? 나에게 너는 아직도 6살 때의 느낌 그대로인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로 기억되고 간직되어 있어.어릴 때의 마음으로 엄마랑 팔베개하고 잠깐만 있어주면 안 될까?"
팔베개 하자는 엄마의 이 낯선 요청에 아들의 마음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하지만 엄마의 눈빛이 너무 간절했던 걸까요?
엄마의 세월을 이해해 주고 싶었던 걸까요?
고맙게도 아들은 이마저도 흔쾌히 응해 주었습니다.
낯선 엄마의 팔베개에 머리를 대고 작고 가냘픈 엄마품에 안긴 20살 아들은 살포시 눈을 감습니다. 조금은 어색함도 있었을 테죠. 하지만 아들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고 고르로운 숨소리를 통하여 전해져 오는 안정적인 느낌은 진정으로 우리가 엄마와 아들임을 인지하게 해 주었습니다.
어떤 요란한 행위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행위는 마음의 표현이고 마음은 행위를 통하여 때로는 천만 마디의 말보다 더 강력한 진정성이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사실 아들이 엄마 곁으로 온다고 할 때 저는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그동안 혼자 자유롭게 살아왔던 삶 속에 누군가와 어울리면서, 부대끼면서 산다는 것이 정말이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딸도 아닌 아들이라니, 마음속에 미안함이 가득해, 아들 앞에서는 죄인의 마음이었던 그 아들과 한 공간에서 살아야 한다니 조금은 걱정되었습니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느껴져야 할 자식이기는 했지만 그동안의 시, 공간적인 간격 때문에 멀게 느껴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거죠.
이런 느낌은 아마 아들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이후 아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당시의 아들의 마음도 알게 되었지만요.
멀고 길게 느껴졌던 14년 세월의 간격을 엄마라는 이름으로 조금이라도 메우고 싶은 이 엄마의 나름의 노력이 아들과 팔베개하고 한 침대에 눕는 그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우리는 늘 그랬으니까요. 분명히 우리는 엄마와 아들이니까요. 죄는 있어도 엄마임을, 우리는 천륜을 가진 엄마와 아들임을 나는 그 행위를 통하여 각인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20살 된 아들의 다 큰 머리를 나의 심장과 가장 가까운 팔 위에 올려놓고 살포시 아들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아팠던 기억. 원망했던 시간들이 아들의 마음속에서 다 떠나가게 해 주세요. 엄마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으니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온 아들의 선택을 아들 자신이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아들이 힘들 때 내가, 이 엄마가 그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