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살 된 아들을 두고 북한을 떠났고 14년 만에 아들이 20살이 되었을 때 한국에서 상봉했습니다. 춥고 배고픔이 극에 달하고 어른도 살아내기 힘들었던 험악한 곳에 6살 된 아들 두고 온 엄마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만은 한국에서 혼자 살고 있었던 10 수년 동안 나의 마음속에서 한 번도 떠나본 적 없었던 아들입니다.
길을 가다가도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도 아들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우리 아들도 이만큼 자랐을까? 하며 가슴 저미군 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혹 자식을 울리는 엄마라도 눈에 띄면 저도 모르게 감정 이입하고 마음이 울컥하면서 왜 울리나. 울며 떼쓰는 아이라도 곁에 있기를 이토록 애타게 바라는 엄마도 있는데.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면서 원망과 안타까운 눈길 보내군 했었적도 많았었지요.
휴일, 명절날, 삼삼오오, 하하호호 부모님들 따라 좋아라 떠들며 놀이공원, 바닷가와 캠핑.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대한민국 엄마들이 참 많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부러웠던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또래의 엄마들이 수다 중. 어쩌다 아들, 딸들과 통화할 때 하는 다소 흥분된 톤의 흥분된 멘트. 목소리에 들어간 힘과 행복감이 함께 어우러진 그 멘트 "응, 아들~~" 그리고 블라블라~~~"아들, 사랑해" 하면서 전화 끊을 때의 행복한 미소. "아들, 사랑해" 하는 바로 그 멘트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삶은 북한보다는 편안했지만 전혀 다른 문화차이에 힘든 부분도 많았습니다. 한국에서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순간 어린 아들은 북한에서 이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 텐데 하는 죄책감에 함부로 속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고, 기쁜 일이 있을때도 어린 아들은 춥고 배고픔에 생사를 오고 갈텐데. 엄마는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고 떠느냐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마음 놓고 웃고 기뻐할 수도 없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5살 된 아들은 숟가락을 들고 찬장 앞에 앉아 멍~~ 하니 찬 잔속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눈뿌리가 빠지도록 들여다봐도 찬장 안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죠. 엄마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아들의 온 마음과 정신은 찬장에 쏠려있습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미여 터지고 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워 소리소리 지르며 목놓아 울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엄마한테 먹을 것 달라고 칭얼대지 않았고 그것이 엄마의 마음을 더 미어지게 했거든요. 아직은 철없이 떼쓰고 억지 쓸 수 있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그래도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는 6살 아들은 너무 일찍 철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 문득 떠날 준비를 합니다. 중국에 있는 친척들을 찾아가 먹을 것을 구해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구걸을 해서라도 이 어린 아들이 찬장만 물끄러미 쳐다보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문득,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습니다. 어린이집에 간 아들을 찾아가 "엄마 잠깐 다녀올게" 하고 어른들과 나누는 가벼운 형식의 인사를 하고 말이죠. 아들을 배고프지 않게 할 식량만 구하면 곧 돌아올 거라 생각했었거든요.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거죠.
엄마의 얼굴에서 비장함을 느꼈을 걸까요? 아들은 따라간다고 떼쓰지 않고 말없이 머리만 끄덕였습니다. 그때 아들의 눈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 떨어질 듯 떨어질 듯했던, 눈만 감으면 눈물은 흐를 것 같았는데 아들은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저는 그때의 상황과 그때의 아들의 모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듯합니다.
그렇게 저는 북한을 떠났습니다. 아들을 살리려고 떠난 걸음이기는 했으나 다시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아들에게는 죄인인 엄마인 거죠.
그러던 제가 20살 된 아들과 상봉했습니다. 두렵고 위험한 긴 과정을 거쳐 아들이 한국으로, 이 엄마 곁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6살에 헤어졌으니 장장 14년 만의 만남이 되네요.
아직은 마음대로의 만남이 허용되지 않을 때, 전화 통화만 가능한 기관에 있었던 그때. 저는 그동안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그 말, "아들 사랑해"를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부러웠던 한국의 엄마들의 흉내를 나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큰 마음을 먹고 통화가 끝나는 시점에 제가 먼저 큰 마음을 먹고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그 말을 툭 뱉었습니다. 또래 엄마들이 그토록 행복감에 취해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했던 그 말, 내 아들에게도 정말 하고 싶었던 그 말을 뱉었습니다.
"아들~~ 사랑해"
그리고 고요함과 정적이 오래도록 수화기 넘어를 오갑니다.
아들에게는 너무 낯선 단어 "사랑"입니다.
한국에서의 사랑의 표현은 다양하지만 북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애정표현에도 사랑한다는 단어보다 "좋아한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북한 생활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개인 간에는 거의 금기시되는 문화입니다. 오직 김일성, 김정일 동지의 사랑과 배려에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인 거죠.
갑자기 오래간만에 통화하는 엄마라는 사람이,
아들 입장에서는 엄마라 불리는 어떤 아줌마가 툭~던지는 "아들, 사랑해"가 얼마나 낯설었을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만큼 당시의 저는 오직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만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로 엄마와 아들사이의 14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던 시간이 되는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그 14년의 세월동안 내 마음속에는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간직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미션을수행할 수 있었다 생각하니 사실 너무 기뻤거든요. 무뚝뚝하고 투박한 북한 남자의 마음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도 저는 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익숙시켜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북한 남성으로 20년 살았던 아들이 한국에서 부드러운 남성으로 한국 여성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라도 감성적인 충격이 필요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엄마들의 모습 속에서 부러웠던, 그 행복해 보였던 상황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ㅎ
며칠 후 두 번째 통화가 있었고 나는 예외 없이 또 같은 멘트를 합니다.
"아들, 사랑해"
솨~~ 하는 첫날의 통화음 대신에 이번에는 "어, 어, 어 어,~~ "하는 짧은 비명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들도 뭔가 반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스킨십은 없었지만 엄마임을 느꼈던 것 같았습니다.
전혀 낯선 단어로 자신을 당황하게 했지만 간절하고 애틋함이 묻어있는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느낀 듯해서 희망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통화 시기가 왔습니다.
또다시 반복되는 엄마의 사랑타령에 드디어 아들이 답변을 주었습니다.
"예, 나두요"
아하. 이렇게 기쁠 수 있을까요?
기대하지 못했던 아들의 반응에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이 기뻤습니다.
아들 앞에서는 분명 죄인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엄마지만, 그래도 엄마였기에 아들에게 그렇게라도 사랑 표현을 하고 싶었습니다.
또래 엄마들을 부러워서라고 표현하지만 실지 마음속에는 고통의 땅에서 힘들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었고 미안함이었고 속죄였습니다.
염치없지만 그리하고 싶었고 오랜 세월 동안 그 단어는 엄마의 소원이었습니다.
나도 아들이 있는, 엄마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아들이 그 소원을 이루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이 엄마 곁으로 왔습니다.
죄가 많아도 엄마인 것을, 미안하고 또 미안해도 내 품에 안으니 이리도 좋은 것을.
이 미안한 엄마를 아들은 그래도 엄마라 불러주었습니다.
한없이 미안한 엄마의 염치없는 사랑타령에 "나도 사랑해"로 아들은 너그럽게 받아주었습니다.
이제 멋진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회 앞에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운 어른으로 자랄 수 있기를 엄마가 늘 원하고 바란다는 것을 아들은 알고 있을 듯합니다.
"고맙다, 아들. 그리고 정말 사랑한다"
"아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