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2. 포기하다
‘훼손’이나 ‘포기’ 따위의 단어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한다. 훼손시킨 사람과 훼손된 물건, 포기하게끔 만든 사람과 포기하게 된 사람. 나는 늘 후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시에 가해자였다.
따가운 가을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 언론사 필기시험을 치렀다. 시험장을 나서니 현 남편, 구 남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시험도 끝났겠다 날씨도 좋겠다 삼청동의 예쁜 돌담도 따라 걷기만 해도 설레는 웃음이 가득했다. 여느 다른 커플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흔한 데이트였지만, 나의 모든 신경은 시계를 향하고 있었다. 장교로 복무 중인 동생이 휴가를 나와 자취방으로 오기까지 시곗바늘이 몇 칸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누나 친구랑 약속 있어서 나왔는데, 조금 늦을 것 같아! 비밀번호 알려줄 테니까 들어가 있어.’
가족보다 사랑 뭐 그런 절절한 로맨스여서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동생과 약속했던 시간을 넘기게 됐고, 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도록 메시지를 남겼다. 다행히 동생은 지인과의 약속이 생겼다며 본인도 조금 늦겠다며 답을 보내왔고, 이내 안심하며 느지막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자정이 되도록 동생은 연락이 없었다. 대신 정적이 도는 자취방에 울린 건 경비실 인터폰이었다.
“아가씨, 여기 좀 내려와 봐야겠는데?”
“무슨 일이세요?”
“이 사람이 아가씨 동생이라는데, 확인 좀 해줘야겠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갔을 때 동생은 벌게진 얼굴로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경비 아저씨는 동생을 범죄자 취급하며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날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동생에게 인생 최악의 하루가 돼버린 상태였다.
동생 최악의 하루를 복기하자면 이렇다. 동생은 내가 늦는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과 만나 식사를 했고, 술도 꽤나 마셨다. 그러다가 내 자취방에 거의 다 와서는, 술 냄새를 싫어하는 내가 마음에 걸려서 선뜻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건물 내의 복도에서 멍하니 서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하필 평소에 경비 아저씨들도 혀를 내두르는 사람과의 마찰이 생긴 거다. 동생이 가만히 서있는 바람에 복도의 센서등 불이 꺼졌고 그때 ‘그 인간’의 여자 친구가 불이 켜짐과 동시에 동생을 발견해서 냅다 소리를 지른 것. 그게 전부다. CCTV에도 선명히 찍혀있는 사실관계이며, 동생은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인간’은 달려와서 내 동생의 멱살을 잡아 범죄자 취급을 한 것. 그러다가 다만 군복을 입은 채로 술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점은 당시 장교였던 동생에게 약점이 됐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은 동생을 법정으로 나를 증인으로 세우기까지 했다.
각설하자. 내가 끄집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사실 이게 아니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생채기가 된 그 일이 일어난 그날, 집으로 들어온 동생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내가 ‘가해자’ 임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누나 나는 사실… 나는 사실 자동차를 안전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
술주정인가 싶어서 부러 먼 산을 바라보며 이부자리를 깔아주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은 술기운을 빌어서 그동안 풀어놓지 못했던 응어리를 뱉어냈다.
“근데 우리 둘 다 하고 싶은 걸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래서 내가 포기했어. 누나라도 하고 싶은 거 하라고. 누나 아나운서 꼭 되라고…”
“…”
“ROTC 하면 돈도 준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적어도 엄마가 나에 대해서는 돈 걱정 안 해도 되니까…
그만하고 싶었는데 그래야 엄마랑 누나 조금이라도 편해지니까.”
방을 알코올 냄새로 가득 채울 만큼 취해서 발음도 뭉개지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내는 감정은 선명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말은 내 숨을 끊어내는 듯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도 하거든.
차라리 내가 죽으면 누나랑 엄마가 사망보험금 받아서 조금이라도 편해지지 않을까.
그러면 엄마도 덜 고생하고, 누나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가해자였다.
내가 쌓아온 탑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그 밑에는 나로 인한 피해자가 있었다. 피해자의 존재조차 몰랐거니와 그 존재가 내 동생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고, 저 아이는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거다.
다음 날, 동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동생의 체온이 남은 이불을 부여잡고 이틀 밤을 꼬박 눈물로 보냈다.
누군가를 희생시키며 안고 가는 꿈 따위는 더 이상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자발적인 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