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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정 Feb 11. 2021

영화 스태프들이 웃으면 안 되는 순간

배우가 우는 장면을 찍을 때의 촬영장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 스태프들은 슛 싸인이 들어가면 숨도 조심히 쉬어야 한다. 배우들의 대사와 스태프들이 낸 잡음이 겹치면, 그건 NG다. 그닥 거슬리지 않으면 후시녹음으로 다시 딸 수도 있지만, 웬만해선 현장 소리로 가는 게 정석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씬이 중요하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조심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바로 감정씬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나 아주 중요한 장면들 중에서 배우들이 울어야 하거나 극 중에서 쌓아 온 감정을 끌어올려야 하는 씬인데, 그런 씬이 있는 날이면 현장 분위기 또한 매우 조용하고 예민하다. 가령 이병헌 선배님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열연을 펼치고 있는데, 본인이 기침을 한다면 촬영이 중단되고 배우는 다시 울어야 한다. 때문에 그런 상황에는 기침이든 무엇이든 무조건 참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 날은 모두가 평소보다 목소리를 낮추고 행동도 작게 하며 배우들이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앞서 남자친구를 처음 만난 날에 대해 서술한 글 <코로나와 함께 온 사람>에 잠시 등장한 녹음팀 동생 경이와 나는 영화 '남한산성' 현장에서 만난 사이다. 연출팀 막내였던 나는 촬영감독님과 카메라가 이동하면 포커스 풀러 오빠를 따라다니며 세트장 밖에 계시는 감독님 모니터 라인을 연결해야 했다. 더불어 촬영이 시작되고 카메라가 REC 상태가 되면, 슬레이트를 치고 앵글에 잡히지 않게 숨어야 했다. 쉽게 말하자면 카메라 옆에 항시 붙어있어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녹음팀 동생 경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이는 녹음팀의 '붐 어시스턴트'였다. 소위 말하는 '붐걸'이었다. (붐 맨이라는 단어는 우리 경이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걸이라고 표현하겠다.) 배우 선배님들의 대사를 긴 마이크를 통해 동시 녹음 기사님에게 전달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다. 고로 경이도 카메라와 배우 선배님들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우리 둘은 웬만하면 현장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화장실을 자유롭게 가지 못 했다. 화장실이 가까웠다면 우리 얼른 뛰어갔다 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당시 촬영장은 강원도 평창의 한 오픈 세트장이었는데, 허허벌판에 지은 터라 화장실이 너무 멀었다. 세트장 앞은 공터가 아주 넓어서 스태프와 배우분들의 주차장으로 쓰고 있었다. 차장으로 쓰이는 그 공터를 지나야만 화장실이 있는 건물이었, 그 길이 족히 800M는 되었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려면 복잡했고 큰 마음먹고 가야 했다. 많이 급하지 않으면 참는 편이 나았다.

영화 <남한산성> 세트장


 덕분에 경이와 나는 어느 촬영 날, 바지에 똥을 쌀 뻔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날따라 배가 심하게 아파 화장실이 급했다. 애석하게도 그날 촬영은 이병헌 선배님(최명길 역)과 김윤석 선배님(김상헌 역)이 박해일 선배님(인조 역)에게 온건파와 강경파의 입장으로 서로의 의견을 올리며 대치를 이루는 아주 중요한 씬이었다. 중요한 씬이니 만큼 촬영장 분위기는 심히 엄숙했다. 모두들 평소와는 다르게 배우 선배님들을 위해 말도 아끼는 때였다. 그래서 경이와 나는 상사들에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못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우리는 현장 안에서 아주 작게 그리고 비밀리에 대화를 나눴다.  "경아, 나 화장실이 너무 급한데.. 언제 갈 수 있을까?" "언니, 나도 미칠 것 같아." 너무 오래전 일이라 소상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이런 대화였다. 우리는 버티고 버텼다. 마침 병헌 선배가 열연을 펼치는 씬이라 더욱더 화장실을 다녀오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다 계속되는 촬영과 눈물에 병헌 선배 눈이 많이 으셨다. 결국 감독님은 화면상 눈 부은 게 티나고 병헌 선배도 힘드시니 조금 쉬었다 하자고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들은 경이와 나는 동시에 쾌재를 외쳤다. 조용히 아싸, 오예를 남발하며 함께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정말 살기 위해 뛰었다. 지금 미친 듯이 달려가서 배출을 해내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달렸다. 하지만 눈이 자주 오던 겨울이라 공터의 진흙은 아주 묽었다. 푹 하고 빠지는 발과 바지에 튀기는 흙은 나를 곤란하게 했다. 게다가 경이는 키가 174이기에 160인 나보다 달리기가 빨랐다. 다리 길이가 달라서 어쩔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이와 같은 속도로 뛰면 똥이 나올 것 같았다. 세차게 달리면 안 될 것 같기에 나는 혼자 죽기 싫어 경이에게 외쳤다. "경아, 죽으려면 같이 죽어야지! 같이 가!" 나의 간절한 외침에 경이는 웃으며 나와 발을 맞춰줬다. 그렇게 우리는 사이좋게 나란히 화장실에 입장했다.


경이와 나는 드디어 먼 길을 달려와 변기에 앉았다. 겨울이라 두터운 옷과 바지를 내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건 분명 생존을 위한 여정이었고, 마침내 배출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 중요한 순간에..... 무전기 속 조감독님이 외치셨다.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희정이 어디 갔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를 부르면 경이도 함께 가야 하는 상황이 분명했다. 경이와 나는 조감독님의 말씀을 듣고 한숨을 쉬며 욕을 했다. 조감독님을 향한 욕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지랄 맞게 힘들었다. 나는 조감독님께 답을 해야 했다. "화장실에 왔습니다. 지금 가고 있습니다." 경이와 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바지를 리고 화장실을 나와 다시 현장을 향해 달려야 했다. 달리고 달려도 먼 현장은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 같았다. 배출을 하지 못한 채 달리니 몸이 더 무거웠다.

당시의 현장

현장에 도착하니 우리만 빼고 모두 촬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경이는 붐을, 나는 슬레이트를 들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나는 곧바로 슛 사인을 받은 후 슬레이트를 치고 카메라 옆에 앉았다. 병헌 선배는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감정을 다잡고 열연을 펼치셨다. 그의 연기는 늘 나에게 충격을 줬다. 실제로 보면 더 쩔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와 연기와 눈빛에 한 심취하며 아픈 배를 부여잡고 심각한 마음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문제 경이 붐 때문에 서 있 내 귀가 경이의 배 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경이의 배에서 아주 알 수 없는 소리가 났다. 그건 분명 사람 배에서 날 수 없는 소리였고, 생전 처음 듣는 요상한 소리였다.  '쁑꾸룩삐익삑!!!!!' '삐이이이익 쁑쁑삐유유웅' '꾸룩끼잉낑낑룩 쀼웅쁑쁑꾸룩삥룩' 연달아 나는 괴상한 소리에 놀라기도 잠시 우리가 함께 했던 긴 여정에 대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촬영 재개가 늦었다면 경이 배에서 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소리 때문에 나는 배가 찢어지도록 웃겼다. 그리고 진심으로 똥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웃거나 움직인다면 감독님과 병헌 선배와 모든 스태프들의 원망을 살 게 뻔했다.


나는 그 날 처음으로 혀를 깨물어봤다. 지금 웃으면 나의 막내 인생은 끝장 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경이의 배는 멈출 줄을 몰랐다. '루꾸루룩 쿵쿵 까락꾸루삐루룩 뿌룽끼릭쀼룽' 텍스트로 전해질 수 없겠지만 그 소리는 화산 폭발과 동시에 로켓 소리, 그 로켓에서 나오는 총알들과 외계인들의 거친 함성소리가 함께 어우러진 소리 같았다. 상황이 악화되자 나는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혀에서 비릿하게 피맛이 났다. 내 어깨는 춤추는 사람처럼 들썩들썩 댔다. 내 귀의 위치 때문인가 싶어서 고개를 숙여 귀를 막아도 봤지만 이전에 들은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계속해서 웃음이 났다. 이런 나를 눈치챈 경이 아주 민망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경이의 표정이 나를 한층 더 미치게 했다. 그래도 악착같이 피맛을 음미하며 혀를 더 세게 깨물었다.


다행히 내가 졸도하기 전에 컷 싸인이 났고, 병헌 선배의 연기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감독님의 오케이 사인을 받자마자, 나는 미친 듯이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웃지 않았으면  내 스스로 사이코패스임을 알게 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경이 또한 나를 따라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우리밖에 모르는 그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하지만 감정씬인 만큼 오케이 사인이 나도 현장 분위기는 여전히 조용했다. 우리의 웃음소리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소리였을 것이다. 덕분에 촬영 감독님께 아주 호되게 혼났다. 그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경이와 나의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물론 그날 저녁부터 며칠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촬영 감독님께 혼난 일이 속상해서 자다가도 깨긴 했다. 그리고 괜히 마주하게 될 때면 화난 모습이 생각나서 고개를 떨구거나 빙 돌아서 피해 다니기도 했다. 촬영감독님! 이날 이런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를 복기하며 글을 쓰니 너무 설렌다. 나는 존경하던 황동혁 감독님과, 감각의 왕 김지용 촬영감독님과 연기의 신 이병헌 선배님, 김윤석 선배님과 함께 작품을 했던 것이 아직도 꿈만 같다.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고 내가 진심으로 흠모하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분들이 한국 영화에 오래도록 기여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 그때는 현장 화장실이 가까운 데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와 경이

- 커버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및 남한산성 스틸 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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