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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정 Oct 31. 2021

집에 가기 무서운 이유

본가에 못 간 지 6개월이 넘었다.

대학에 합격한 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가를 떠나 서울로 와야 했다. 올해로 서울살이 8년 차인데 해가 지날수록 본가에 가는 게 두려워진다. 스무 살 초반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에 꼭 부모님을 뵈러 가곤 했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합격한 딸로서 당당히.


영화 일을 하느라 휴학을 2년이나 해버려서 졸업한 지 2년 차밖에 되지 않았다.(2년 차'밖에'라고 생각한다.) 이런 나와 달리 당연히 회사에 오래 다녀 꽤 높은 직급으로 일 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니 자연스레 부모님 얼굴 보기가 두려워진다. 엄마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지만 본가에 도착하기 전에 '올해는 또 어떤 감언이설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이 먼저 앞선다.


우리 집안에는 명절을 꼭 같이 보내야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명절에 할머니네 집에 가지 않겠다고 악을 쓰던 어린 나를 질질 끌고 가던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 후로 명절에는 꼭 할머니네 집은 물론이요, 서울에 올라와서도 꼬박꼬박 군말 안 하고 내려가곤 했다. 어릴 적에 가기 싫은 이유는 그냥 가기 싫어서였다. 생각보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설명하는 것처럼 그렇게 야박한 집안이 아니다. 명절에 친척분들이 직장은 언제 구하니, 결혼은 언제 하니 하고 묻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게 더 부담스럽다. 물어보질 않으니 일부러 나서서 저 지금 무얼 하고 있고요, 누굴 만나고 있고요, 뭘 준비하고 있고요, 뭐가 되고 싶고요...... 

나이가 드니 이런 이유로 명절조차 할머니 댁은커녕 본가에 가기 두려워졌다. 나 말고 부모님 얼굴 화끈 거리는 게 느껴져서다.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라고 팍팍 밀어주시는 부모님이지만 어찌 허송세월 보내는 것 같은 딸이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나. 그 마음이 느껴져서 점점 부모님 얼굴 보기가 두렵다. 죄를 짓고 사는 기분이다. 그래서 올해는 명절에도 가지 않았다. 서울에 코로나가 어쩌고, 자가 격리가 어쩌고, 이사를 해야 해서, 일이 바빠서.


잔뜩 겁을 먹고 우리 집안 룰을 어기는 나의 행동으로 인해 혹여나 부모님이 화가 나지 않을까 며칠 동안 걱정이 됐다. 하지만 부모님은 흔쾌히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밥을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전하셨다. 서울에 코로나가, 자가 격리가, 이사가, 일이 바빠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이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그냥 알았다고 해주신다. 그래서 나도 알았다고 했다. 알겠어요 엄마, 알겠어요 아빠. 밥 잘 챙겨 드세요.


나는 귀신보다 본가 가는 게 더 무섭다. 나는 돈보다 본가 가는 게 더 무섭다. 나는 땅콩이 사료 떨어지는 것보다 본가 가는 게 더 무섭다. 당당하고 멋진 딸이 되고 싶은 욕심이 이렇게나 무섭다. 이렇게나 평범하고 소박한 것이 나는 제일 무섭다. 내년 명절에는 양 손 가득 선물과 마음을 담아 본가에 가는 내가 되어있기를 바란다.


p.s 제가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부모님 찾아갈 시간은 있고요. 저도 엄마 아빠랑 맛있는 밥 마주 보고 먹고 싶은데..... 빨리 성공하고 싶어요. 당당하게 부모님 앞에서 제가 산 재료들로 요리도 해드리고 싶고, 제 마음이 담긴 선물들도 사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두 달 남짓 남은 올해도 열심히 살아보려고요. 세상이 저를 등져도 제 편일 것을 알기에 열심히 해보려고요. 딱 서른 살까지, 서른 살까지 글 열심히 써보려고요. 엄마 아빠! 오늘도 너무 보고 싶어요. 후회 없이 살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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