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뷰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곤히 잠든 남자의 코고는 소리로 시작된다. 남자는 잠들어있고, 여자는 옆에서 모로 누워 그를 지켜보고 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느낌이다. 그러다 조용히 일어나 운동화를 신고는, 베낭 하나를 메고 옆 방에서 자고 있던 3살짜리 아이을 데리고 차에 오른다. 망설임 없이 시동을 켜고 밤길을 내처 달린다. 마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려본 것처럼 행동엔 막힘이 없다.
미국의 TV 시리즈 <조용한 희망>은 달랑 18달러를 들고 딸을 데리고 집을 나온 알렉스의 결단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이 하나 있다. 바로 알렉스가 왜 남편 숀을 뒤로하고 집을 나오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정황은 생략되고, 그가 집을 나서는 것부터 드라마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물론 알렉스가 술에 취한 듯한 숀, 격앙되어 벽을 치는 숀의 이미지를 머리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몇 번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기에 대략 추측은 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을 설명해주진 않는다.
집을 나온 이유뿐만이 아니다. 어쩌다 저런 놈팽이랑 결혼했는지, 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건지, 왜 도움 청할 곳이 이렇게 없는지, 알렉스의 그 어떠한 사정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물음표 하나를 품은 채로 알렉스의 여정을 뒤따르게 될 뿐이다. 그렇기에 사회보장제도의 도움을 받기 위해 알렉스가 정부 기관을 방문했을 때에도 시청자도 그와 함께 혼란을 겪게 된다.
직원은 알렉스에게 이것 저것 연이어 질문하는데, 좀처럼 상황이 명료해지지 않는다. 노숙자냐는 질문에도 “아니요", 그럼 집이 있는 거냐는 질문에도 “아니요", 숀의 모습에 위협을 느껴서 집을 나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학대 당한 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경찰에 신고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 “학대 당한 것도, 홈리스도 아닌데 왜 이곳에 왔죠?”라는 직원의 질문에 알렉스는 “오늘 잠 잘 곳이 없어요"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이 작품은 단독 주인공에 대한 쉬운 공감을 방해한다. 딱한 사정의 주인공에게 빨리 이입해서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약간의 의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아마 1화를 보는 적지 않은 시청자들은 속으로 ‘집까지 나갈 정도인가?’라며 회의하지 않았을까? ‘애까지 데리고 무책임하게...’라는 판단, ‘저 정도면 나올 정도는 아닐텐데...'라는 평가에서 얼마나 자유로웠을까? 적어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시리즈를 다 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1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조용한 희망>은 한 편 한 편의 밀도가 비슷하게 높은 편이다. 왜나하면 집을 나와 알렉스가 물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독립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당연히) 전쟁과도 같기 때문이다. 첫 일자리로 얻은 청소업에 적응하는 과정, 불건강한 관계에 묶여 있는 엄마를 지키려 노력하는 과정, 남편과 얼키고 설킨 인연의 끈을 정리해가는 과정, 본인이 가정폭력의 피해자임을 인지해가는 과정, 완전 양육권을 얻기 위한 지난한 과정, 딸 매디에게 좋은 어린이집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 친부의 과거를 뒤늦게 알게 되는 과정, 못된 클라이언트와 관계를 쌓아나가는 과정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게다가 고난이 연이어 발생하자, 조금씩이나마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던 알렉스가 또다시 원래 자리로 회귀하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는 나 또한 스킵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밀도 높은 고통에 동행하고 나자, 그제야 알렉스를 진정으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숀의 학대자적 면모, 가족을 학대했던 아버지의 과거, 정신 병리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던 알렉스에 대한 어머니의 깊은 사랑 등이 뒤늦게 드러나는데, 그럴 때마다 퍼즐이 맞춰지듯 알렉스의 지난 행동들이 와닿게 되기 때문이다. 왜 다정하게 굴려는 아버지에게 적대적으로 굴며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도 그의 호의를 거절만 하는지, 알코홀릭 놈팽이인 숀에게 왜 취약해지는지... 모든 것들이 설명된다.
특히 끝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알렉스를 숀이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씬에서는, 정서적 학대라는 것이 직접적인 물리적 가해 없이도 얼마나 한 사람을 손상시킬 수 있는지를 소상히 보여주는데, 이 대목은 1화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1화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그저 드르렁 코를 고는 남자를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다 집을 나가는 알렉스만 그려질 뿐인데,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있었을 숀의 무수한 학대를 짐작게 하는 것이다. 기동성을 박탈하고, 행동을 통제하고, 자율성을 빼앗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는, 모호한 학대들... 그러나 언어화하기 힘들고, ‘가해'라고 쉽게 판단하지 못하게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한 사람을 삶을 끔찍하게 망가뜨려버리는 그 정확한 학대들을 말이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이러한 심적 고통의 단계가 지났을 때, 그제야 공감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아늑한 자리에 누워서 값싼 동정과 관심을 주고 영화가 끝나면 모든 걸 잊어버리고 자신의 안전함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렉스의 삶에 함께 하려 할 때, 그래서 같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그때 비로소 공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용한 희망>은 누군가의 일생을 무너뜨리는 고통 앞에서 손쉬운 공감은 진정한 공감이 아니다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적어도 함께 아프고 슬퍼하는 최소한의 양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하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정서적 학대는 한 사람의 영혼을 손상시킨다. 가둔 것도 아닌데 왜 도망치지 못했냐, 왜 이렇게 오래 참았냐, 진작 신고를 하지 왜 안 했냐, 실제로는 괜찮았던 것 아니냐?, 라는 의심들도 또다른 학대들이다. 스스로가 힘든 상황에 처해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정서적 학대의 가장 끔찍한 부분이다.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이들에게는 쉽게 의심이 뒤따른다. 많은 폭력 피해자들이, 특히 성별 권력 관계에서 약자가 되는 여성들이 이러한 의심에 다시 한 번 갇혀버린다. 작중에서도 가정 폭력 피해자 쉼터를 운영하는 이는 말한다. 폭력 피해자들이 완전히 가해자로부터 독립하기까지 평균 7번의 시도가 필요하다고. 큰 결심을 하고 떠났다가 결국엔 다시 가해자 곁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피해 경험이 없는 이는 감히 다 알 수 없는 아주 고통스러운 매커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삶을 볼 때, 타인의 고통을 대할 때 더 조용해질 필요가 있다. 그저 할 수 있는 건, 그가 조용한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곁에서 꾸준히 함께하는 것이다. 일곱 번 넘어질 때, 일곱 번 함께 넘어져주는 것일테다. 그러면 여덟 번째엔 함께 언덕에 올라 환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나 훌륭했던 엔딩씬처럼.
2022.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