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셋 말하기
"우와, 너 목소리가 허스키하다."
말을 건네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소리 그 자체에 처음으로 집중했던 건 열 살 때였습니다. 그 해 처음으로 컴퓨터를 갖게 된 저는 캐릭터를 키우는 육성 RPG게임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한 또래의 친구와 친해지기도 했죠. 그렇게 '사이버천사'와 '오랜지제도'는 차츰 친밀해져, 어느 날 우리는 전화 통화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두근두근 첫 인사를 나누었고, 이때 오랜지제도가 제 목소리를 듣고는 '허스키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공부도 고만 고만 피아노 연주도 고만 고만... 딱히 튈 거리가 없던 저는 이 어감도 낯선 외래어 '허스키'에 들뜨고 말았던 듯합니다.
어릴 때부터 말을 또박또박하게 하는 아이이긴 했다고 합니다. 궁금한 건 질문하고 할 말은 하고 어른들에게 잔소리도 하는 똑똑이 스타일이었나 봅니다. 그런 기질을 가진 데다가 목소리가 꽤 두드러진다는 평을 받아서였을까요. 말 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자, 그래 아나운서가 되자, 꿈을 갖게 됩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학교 방송반에 들어가 아나운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이크를 통해 제 목소리가 전교에 울려퍼지는 경험은 예상만큼이나 아주 짜릿했습니다. 관심 받고 사랑 받고 인정 받고 싶었던 저의 결핍을 적지 않게 채워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저는 제법 맹랑하기도 했던 똑똑이 기질을 꽤 잃게 됩니다. 여러 이유로 주변의 눈치를 많이 보는 청소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과 사랑보다는 부모님의 뿌듯해하는 얼굴, 믿음을 보내주는 선생님의 표정, 모범생 반장을 썩 좋게 봐주는 학급 친구들의 눈빛에 더 무게를 달게 되죠. 저의 목소리 또한 덩달아 변했습니다.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보이지 못하고 숨어들어가는 느낌으로요. 소리의 힘도 약하여, 누군가에게 말을 걸 때면 상대가 "네? 뭐라고요?"며 되묻곤 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말을 걸 때부터 조심스러워져 움츠러든 채로 말을 걸고 문장의 맺음도 명확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운 톤으로 자리잡혔습니다. 여성들 중에는 목소리가 낮은 경우가 많진 않기에, 때로는 이 톤이 주의를 끌기엔 효과적이었습니다. 차분 3스푼에 우울 1스푼이 섞인 저의 낮은 톤은 조용한 장소에서 울려퍼질 때 힘을 발휘하곤 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압니다. 그런 톤이 당시엔 편안하게 느껴졌겠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톤이었다는 것을요. 위축되고 타인을 경계하고 스스로에 고립돼있던 제 마음을이 목소리에 그대로 반영했던 것입니다. 힘이 없고, 소극적이고, 뻗어나가질 못했죠.
낭독할 때는 더 심했습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교내 방송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예쁘고 고운 톤으로 목소리를 바꾸어내던 것에 익숙해졌던 차였습니다. 이십대 중반 무렵, 시 낭송 콘테스트에 지원하려고 녹음했던 파일을 5,6년이 지나 들었다가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십수년 전 과거가 아니라 불과 몇 해 전의 과거인데도, 지금과는 너무나 다르게 제가 곱고 연약한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인트는 타고난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제가 무언가를 꾸며내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처음 라디오 DJ가 되었을 때에도 한동안 엉망이었습니다.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는 뉴스 리딩이나 아나운서처럼 읽는 방법을 배워온터라 제 말투는 더욱 부자연스러워졌습니다. 라디오 오프닝처럼 원고가 있는 대목을 읽을 때에는 참으로 어색했고, 누가 들어도 '원고를 읽는구나'할 만한 리딩이었습니다.
하지만 경험과 연습이 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연예인들에게 카메라 마사지가 있다면 저는 마이크 마사지라고 할까나요. 매일 헤드폰을 끼고 제 목소리를 모니터하면서 발성과 발음이 점차 탄탄해져가게되었습니다. 소리가 탄탄해져갈수록 성격도 점점 당당해졌습니다. 첫인상으로 차분하고 조용해보이는다는 얘기를 많이 듣던 제가, 당당하고 시원스러워보인다는 평을 듣게 되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캠페인 스팟 광고, 밝은 톤의 내레이션 등 다양한 톤을 연출해볼 기회를 갖게 되면서는, 제 목소리가 또 한 번 변화했습니다. 밝고 쾌활한 톤이나 유머러스하고 능청스러운 톤 등, 평생 제가 가져보지 못한 모습을 목소리로 내어보면서 발성과 목소리 연출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제 목소리의 한계를 깨 나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고정관념에서도 꽤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소리는 훨씬 힘 있고 시원해졌고, 이와 비례하여 타인을 대하는 저의 태도 또한 한층 솔직해지고 당차졌습니다.
중2였던가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짝꿍끼리 서로 장단점을 써보라 제안했습니다. 저와 꽤 친밀했던 짝궁은 저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장점 : 착하다, 단점 : 너무 착하다(거절을 잘 못함)'. 지금의 저라면 아마 꽤 다른 내용이 나올 것입니다. 착함의 미덕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중2 최다희의 장단점 묘사에 나오는, 주변인들의 눈치를 너무 보다 자기주장을 놓쳐버리는 위축된 마음이 속상하다는 것입니다.
제 진짜 목소리를 찾는 여정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아주 다른 사람일 겁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버전의 제가 마음에 듭니다. 물론 앞으로도 다뤄야할 자기혐오와 열등감이 있지만, 그래도 저는 제가 찍은 유튜브 영상을 볼 때, 그 친구가 말하는 방식과 목소리가 좋더라고요. 저는 앞으로도 꾸준히 저에 대해 알아가고 탐구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엔 늘 '목소리'가 있을 겁니다. 때로는 목소리 훈련이 앞설 것이고, 때로는 마음의 성장이 앞서겠죠.
마음과 목소리, 목소리와 마음. 저는 탄탄한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더 단단한 자아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에 대한 확신이 생길수록 목소리 또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나다운 목소리를 찾으시기를 기원해봅니다. 그 길 위에서, 새로운 여러분을 만날 수 있으리라 전 확신합니다.
* 마인드셋 말하기는 앞으로 정기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