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숭모근은 말랑해질 것인가

백수의 숭모근

by 다이앤

'개념'이란 건 참 재미있다. 사실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 모두 그라데이션과도 같이 연속적인 것인데, '일', '주', '달'이라는 구분이 있기에 때론 괜한 감상을 갖기도 하다. 백수 첫주를 앞둔 주말에 괜히 긴장됐던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목요일에 모든 일이 끝나 짐을 챙겨 회사를 나서는 그 순간부터 사실 난 백수가 된 것인데, 괜시리 새로운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특별한 건 없었다. 그간 비교적 자유도가 보장된 프리랜서로 일해서 그런지, 출근 안 하는 월요일 아침이라는 것에 딱히 어색함을 느끼지도 않았고, 그냥 평이하게 하루가 흘러갔다. 물론 새벽 6시에 일어나 미라클 모닝을 맞이해야겠다는 다짐은 깔끔하게 애초에 없었던 것으로 취급했다. 그저 9시 정도가 되어 일어났을 때, 막연히 하루가 길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름 예쁘게 차려 아침을 먹고, 백수 기간 가장 큰 목표인 '유튜브 재정비'를 위해 내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이것저것 정보를 모았다. 어떤 영상이 특히 인기였는지 알아보고(몇 개 없다) 그간 조금씩 모아온 아이디어들을 대충 정리했다. 커뮤니티에 글도 처음으로 올렸다. 나 이제 다시 유튜브 할 거다? 진짜다??? 식의 나름의 생존 신고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일찍 점심을 먹었다. 외출 일정이 있었다. 운 좋게 서울시 마음 건강 지원 사업의 대상자로 선정되어 심리 상담 예약을 잡아놓았던 터였다. 내향인 듯 외향인 듯 아리까리한 성격이라 백수 기간에도 하루에 최소 한 번은 외출해야함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일정을 분산해 군데 군데 배치하려 했다. 나서는 김에 아껴둔 스벅 기프티콘이라도 쓰려고 조금 일찍 집에서 나왔다. 길을 나섰는데 갑자기 여름이 온 것 같았다. 상담 시간을 기다리며 아이스 소이 라떼를 마시는데 이미 피곤했다. 상담을 받는다니 들떠서 화장도 조금 하고 여름 바지를 개시했더니 기분이 좋았었는데 또 금방 지치고 말았다. 방전이 빠른 나이기에 여름엔 주의해야하는데... 방심했다. 좀 더 철두철미한 백수가 되도록 하자.


상담을 받기로 결심했던 건 대인 관계에서 좀 더 가볍고 덜 예민한 내가 되고 싶어서였다. 더듬이가 달린 것마냥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성격까지는 그럭저럭 수용하고 좋게 받아들이려 하는데, 특히 취약해지는 유의 사람이나 상황이 있다. 그 부분을 잘 다듬고 싶었다. 다행히 상담 공간도 편안하고 선생님도 편안하게 느껴졌다. 상담은 언제 받느냐에 따라 기대하는 바가 달라지는 듯하다. 이번에는 내 얘기를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고, 내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도 해주는 이를 만나는 것 자체로도 큰 힘을 받는다. 평소 주변인에게 완전히 의지하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해서 조금 아쉬운데, 이 또한 다뤄보자.


상담이 끝나고 근처에 NC백화점에 잠시 들렀다. 최근 컴퓨터 작업도 오래 하고, 스마트폰도 너무 들여다봤더니 눈이 약해져서 여름의 강한 자외선이 더 따갑게 느껴졌다. 선글라스 사러 들렀는데 마땅한 걸 찾지 못했고, 대신 아버지 생신 선물을 저렴하게 획득했다. 두 번째 방문인데 올 때마다 아웃도어 행사를 하고 있다. 부산에서도 그랬다. NC백화점의 아이덴티티 같은 걸까? 아무튼 고마운 행사이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가장 빛이 강할 때 몇 시간 돌아다녔더니 급 피곤해졌다. 원래는 카페에서 좀 더 이것 저것 작업을 하려했는데 철회하고 귀가하기로 했다. 돌아와서는 회복하느라 두 세시간 소파에 누워있었다(자주 등장할 예정인 소파). 그러다 정말 겨우 일어나 필라테스에 다녀왔는데, 역대급으로 힘들었다. 일을 마무리하느라 몸에 독소가 너무 쌓였구나 싶었다.


둘째날에는 좀 더 늦잠을 잤다. 프리랜서 동료 친구에게 일찍 기상할 거라고 포부를 밝힐 때 친구는 좀 더 자라고, 늦잠 자고 좀 쉬라고 말했는데, 속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느지막이 샐러드 파스타를 왕창 만들어 배 터지게 먹었다. 수면욕과 식욕에 몸을 맡긴 오전이었다. 그러고는 직전 직장에서 인터뷰이로 뵈었던 장은주 작가님께 드릴 선물을 만들었다. 명함을 예전 버전만 가지고 계셔서(017번호와 야후 메일이 적혀있는...), 포토샵을 켜서 이리 저리 만져보았다. 전문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작가님의 과거 그림과 현재 이모티콘 작품이 함께 들어있는 명함을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즉흥적으로 강원도에 사는 친구네 놀러가기로 한 터여서 후닥닥 마무리하고 예약해둔 미용실에 들러 모처럼 머리를 다듬고 동쪽으로 향했다. 예닐곱시 쯤 탔는데, 5월 말의 그쯤은 참 아름다운 시간대가 아닐 수 없다. 물이 찰박 찰박 차오른 논에 마법 같은 일몰이 드리웠다. 말 그대로 매직 아워였다. 좋은 음악이나 들으며 풍경을 눈에 담았으면 눈 건강에도 좋았을 것을, 대부분 스마트폰을 봤다는 게 좀 아쉽긴 하다만...


친구집 동네는 서울보다 한적하다. 개천을 따라 산책도 할 수 있고, 길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 점이 가장 좋다. 여행하듯 친구네에서 빈둥댔다. 도서관에도 가고, 산책도 하고... 돈 벌러 간 친구 대신 친구집이서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지난 주말에는 막연히 백수 라이프가 걱정되었는데, 강원도 밤공기를 느끼며 산책하자니, 지금이 꽤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의 연속성, 시간의 그라데이션을 오랜만에 다시금 느낀 듯하다. 시간을 분 단위로 딱딱 잘라서 내일은 몇시에 일어나 뭘 해야지, 숫자와 투두 리스트로 점철된, 그래서 떠올리기만 해도 부담되는, 그런 분절된 것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과 그 다음들로만 이어진 그런 시간. 고운 입자의 모래 알들이 쿨하게 놓여 있는 파도에 휩쓸리는 대로, 바람에 날리는 대로, 당분간은 그렇게 살고 싶다.


평소 긴장도도 높고 방전도 쉽게 되는, 숭모근이 늘 딱딱한 나인데 조금씩 말랑해지면 좋겠다고 욕심도 부려본다. 건강하게 먹이고 운동도 잘 시키고 충실하게 지낼 터이니 이 정도 욕심은 부릴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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