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주간의 끝은 뭐니 뭐니 해도 임원 선거라고 할까. 학급 회장과 부회장을 뽑으면 그제서야 아, 진짜 개학했다! 우리 반 제대로 시작! 이런 느낌이다.
오늘은 개학 딱 일주일 째 되는 날. 1교시에 학급 임원 선거를 했다.
"회장 선거를 하겠습니다. 회장 출마할 사람?"
"저요!"
진원이가 손을 들었다. 지난 주에 오늘 있을 학급 선거를 공지할 때부터 누가 봐도 당장 출마할 것처럼 몸을 들썩였던 친구라 이미 예상한 터였다.
"역시 진원이! 얘들아 뒤에 붙어 있는 진원이 자기 소개서에 올해의 목표 뭐라고 적었게?"
"뭐예요?"
"회장 되기야."
진원이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니 근데 한 명만 나오면 선거가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데..? 부회장도 몇 명 나올지 알 수가 없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을까봐 걱정됐던 나는 다른 후보자들도 나올 수 있도록 독려를 했다. 고민만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도전해보라고 말이다. 그러자 해진이가 손을 들었다.
"저 나가보겠습니다!"
"와 좋아, 용기가 멋있다."
이렇게 해서 후보가 두 명 생겼다. 공약 발표를 하는데 둘 다 무난하게 잘 마쳤다.
결과는 진원이 당첨. 자기 이름 옆에 작대기가 늘어갈 때마다 연신 '나이스!' 하고 외치길래 자제시킬까 하다가 그냥 뒀다.
"회장은 진원이가 되었습니다. 박수!"
"우와아아!"
"진원이 벌써 올해의 목표를 이뤘네. 축하한다."
그리고 여학생은 통통 튀는 발표가 돋보였던 은정이, 똘똘해 보이는 (그러나 공약은 대충 발표한) 도윤이가 되었다. 당선 소감을 발표시키니까 은정이가 마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여배우처럼 감격하며 말했다.
"일단 너무 기쁘구요!!"
"와하하하!"
애들이 다 빵 터졌다. 공약 발표를 할 때도 까먹었는데 종이를 보고 해도 되나며 솔직하게 물어보고 정말 열심히 공약 발표를 한 친구였는데 아이들도 그 귀엽고 솔직한 모습을 좋게 보고 뽑아준 것 같았다. 자기 표가 20표가 나왔는데 한 표 한 표 늘어갈 때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얼굴에 써 놓은 것 같아서 너무 웃겼다. 어제 점심 시간에 보니 혼자서만 교실에서 놀고 있길래 친구가 없나 걱정을 했는데, 다 기우였나 보다.
오늘부터 진원이는 회장으로서 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여럿 있었다. 우선 체육 시간에 체육 선생님께 인사를 했고, 국민 체조를 하는데 앞에 나와 모범을 보여야 했다. 국민 체조를 할 줄도 모르는데 말이다. 체육 선생님을 보면서 엉거주춤 따라하며 열심히 하는 모습이 짠했다. (그나저나 아무도 국민 체조를 아는 학생이 없다. 이것이 세대 차이인가..충격)
다른 임무는 우리 반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급식 먹으러 이동하기 전, 회장, 부회장에게 당부를 했다.
"여러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변을 살펴보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지적을 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현준님 줄을 바로 서 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해요."
"네!"
사실 친구들끼리 존칭어로 지적하게 하는 건 다른 선생님께서 하는 게 좋아보여 올해 처음 시작해 본 거였다. 내가 들어도 오글거리는데 자기들끼리는 더 할 것 같아 시도만 해보고 강하게 밀고 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동하는데 존칭어로 지적하는 말이 뒤에서 많이 들려왔다.
"OO님 좀 조용히 해주십시오."
"ㅁㅁ님 장난치지 말아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거라고 했더니 지적 당한 아이들도 순순히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맨 앞에서 앞장 서서 걷는 나는 그 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자꾸 나왔다.
그리고 6교시,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내가 뭐라고 이야기하던 중이었는데, 어디선가 이런 대화가 들려왔다.
"너 회장이잖아. 회장이 그래도 돼?"
농담조였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진원이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을 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을 돕겠다고 했지, 다른 건 말 한 적 없는데?"
자기는 친구들을 돕겠다고 공약을 내건 거니, 그 외에 다른 모범을 보여야 할 이유는 없다는 듯한 발언이었다. 사실 앞 시간에도 이런 말을 몇 번 듣긴 했는데 회장이 돼서 많이 들떴나 보다 싶기도 했고, 실제로 행동할 때는 의젓하게 잘 하길래 그냥 넘어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첫 날부터 레임덕이 된 회장이라니..?
"진원아."
"네.."
"네가 회장이 되고 싶다고 했던 말들은 회장이 되고 나면 끝이야?"
"아니요.."
"회장만 되면 공약이고 나발이고 네 멋대로 행동해도 돼?"
"아니요...."
다시 시무룩해진 진원이.. 그러고 회장, 부회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로 이야기하고 수업을 마쳤는데 다행히 마지막 인사를 시킬 때쯤에는 다시 씩씩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다 보니 여과 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는 일이 종종 있다.
오늘 6교시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혼자가 아니야 바네사' 그림책을 읽는 중이었다. 바네사라는 여자 아이가 전학을 왔는데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함께 보며 물었다.
"얘들아, 너희가 바네사라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너무 속상해요."
"슬퍼요."
"우울해요."
예상한 대답이 나오는 와중에 저 멀리서 민승이가 말했다.
"자퇴 마렵네."
민승이는 인사도 잘 하고 씩씩한 남자앤데 첫날부터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말을 하길래 계속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권민승. 다시 말해 봐."
"..."
"방금 했던 말 다시 해보라니까."
"..."
"네가 말 못 한다는 건 그 말이 떳떳하지 않은 말이라는 거야. 너 스스로한테 떳떳하지 못한 말은 하지 마라. 알겠니?"
"넹.." ('넹'이라고 했다. 이것도 지적했어야 했는데...)
민승이는 선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아직 잘 모르는 아이인 것 같다.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러는 게 아니라, 웃기고 싶은 드립 욕심에 원래 쓰던 은어가 합쳐지니 자기도 의도하지 않은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리라. 일단 당분간 그 선을 단호하게 알려주고, 또 잘했을 때는 칭찬도 많이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급식실 줄 설 때 장난치지 말라고 경고했더니 다음 날 아주 얌전히 줄을 서는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정신 없이 생활하다 보면 칭찬 많이 해줘야지! 하면서도 잘 못 해줄 때가 많고, 1분 명상해야지! 하면서도 까먹고 하루 종일 명상을 못 할 때가 많다. 오늘도 그랬다. 그러고 나면 꼭 보내고 나서야 후회하고, 다음 날 또 까먹는다. 그래도 격려만큼은 나도 입과 몸에 익도록 해줘야 할 것 같아 계속 신경 쓰는 중이다.
새 학기, 나도 아이들도 적응하느라 힘을 많이 쓰고 있는데 오늘 그나마 엄근진 모드에서 탈출해서 아이들과 많이 웃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 마음이 하다. 3월에는 웃지 말아야 한다, 잘해주는 건 언제나 잘해줄 수 있다는 여러 선생님들의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지혜(?)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모르겠다. 나는 이제 애들한테 마음껏 좋아하는 마음도 표현하고 혼낼 때는 단호하게 혼도 내면서 지지고 볶고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다. 일 년이 지나면 나한테 뭐가 맞는지 보이겠지.
개학 주간 나 자신 너무 너무 수고했고 학급 세우기가 끝나가는 참이니 앞으로는 초등 교육과정 중에서 난이도 높은 5학년 수업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