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웃으며 바라보게 될 거야'
지금 나는 속초에 머물고 있다. 속초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큰 청초호(사주에 의해 바다와 나누어진 석호이다)를 사이에 두고 그 주변으로 도시가 동그랗게 형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중 '너의 이름은'에 나오는 도시의 느낌과 비슷하다(물론 속초가 더 매력적이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에 손을 흔들면 보일 듯하고, 소리를 치면 닿을 듯하다.
이 평화로운 도시에 2층짜리 맥도날드가 하나 있는데, 난 가끔 노트북을 들고 맥너겟과 커피를 시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먹는 것도 낭만적이지만, 맥도날드에서 커피를 먹노라면 특유의 감성을 경험할 수 있다. 맥도날드 속초점 2층에는 내가 다녀본 다른 지점보다 작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코로나 때문에 그 작은 공간에서조차 앉을 수 있는 공간은 고작 3 테이블뿐이다. 난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맥너겟과 커피를 두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맞은편으로 배구공(피구를 할 때 사용한 듯하다)을 들고 아직 땀이 채 마르지 않은 어린아이 두 명이 앉았다. 아까 키오스크에서 주문할 때 내 옆으로 우르르 와있던 아이들 중의 일부였다. 초등학생인지 중학생인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한 번에 구별할 수 있었지만, 어느새 아이들의 나이를 구별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두 명은 음료수와 감자튀김을 두고 걱정 담긴 동심의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최근 찌든 때가 묻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와서인가 순수함이 가득 묻어나는 그 순백의 대화가 나의 귀에 향긋이 다가왔다. 어린아이 일지라도 남의 말을 엿들으면 안 된단 걸 알지만 순수한 대화는 너무 매력적이었고 듣기에 너무 화창한 날씨였다. 그래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척하며 살짝 엿들었다. 내용은 비밀이다!
나도 잠시 동심의 세계로 빠지는 듯했다. 그리고 지금 난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여느 어른들이나 부모들이 느끼는 것은 '저런 사소한 일이 저 아이들에겐 큰 걱정이구나, 부럽다'라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사소한 일에 크게 걱정하는 것을 보면 귀엽기도 하면서 부럽기도 하다. 어른이 되면 더 많은 일을 마주하게 되고 그만큼 걱정은 배가 되어 늘어나고 농도도 짙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왜 어릴 땐 그 사소한 일로 큰 걱정을 했었나 싶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들의 걱정이 마냥 귀엽고, 고등학생이 되면 중학생의 걱정이 마냥 귀엽다. 대학생은 고등학생의 걱정을 부러워하고, 어른들은 대학생들의 청춘 걱정이 부럽다. 30대는 20대를 그리고 노인은 중년을... 그렇게 수 없이 이어나간다. 이제 막 어른이 되어 세상의 풍파를 한두 번 밖에 맞아보지 못한 젊은 친구들이 이것을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꼭 젊지 않아도 좋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걱정이 절대 쉬운 일이라던가 걱정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에겐 각자의 걱정이 존재하고, 그 걱정의 무게를 존중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든 걱정이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결국 모두 지금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처럼, 지금의 걱정 또한 인생의 흘러가는 물에 떠있는 나뭇잎이다. 언젠가 훗날의 당신이 보았을 때 분명 지금을 버텨내고 있는 당신이 대견해 보일 것이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지금의 걱정은 먼 날의 추억이 될 것이다.
오늘 나의 걱정의 무게는 훗날 성숙해지며 그 무게가 점차 가벼워질 것이고, 나의 더해가는 현명함은 이를 해결해주는 지혜를 안겨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에 비해 성숙한 나를 너무 모질게 대하지 말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 가장 어리고 순수한 나를 조금 더 소중히 아껴주자.
자, 독자에게 작은 부탁을 드리고자 한다. 10년 전의 나에게(더 길거나 짧아도 좋다)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걱정에 대하여 미래의 내가 응원에 말을 한번 남겨보라.
생각했는가?
그것이 곧 미래의 당신이 현재의 당신에게 전해줄 말이다.
오늘의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에 가장 성숙했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하면 가장 어리지 않는가?
우리, 어린 나를 더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