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의 존재, 엄마
저녁을 먹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수다로 TV 소리를 메우다가, 시곗바늘이 11시를 지날 때면 엄마는 꼭 말씀하신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저무네. 엄마의 남은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이 지나간다.” 난 이 말을 참 싫어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본디 삶이란 죽음과의 대척점이 아닌, 죽음의 또 다른 본질이다. 누구나 태어나는 동시에 죽어간다. 들숨으로 생명을, 날숨으로 소멸을.
어릴 적 나에게 엄마는 불사의 존재였다. 종이에 베여 좁쌀만 한 생채기에도 한 움큼의 울음을 쏟아내는 나와 달리, 엄마는 그 흔한 밴드조차 붙이지 않으셨다. 휴지로 몇 초 지압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봐도 무거운 비닐봉지는 늘 엄마의 몫이었다. 난 옆에서 한 손으론 아이스크림을, 한 손으론 엄마의 팔소매를 붙잡으며 집으로 오곤 했다.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면 엄마는 곧바로 약통에서 적절한 약을 꺼내 물과 함께 주셨다. 엄마는 아픈 적이 없었다. 내가 연례행사 수준으로 매년 한두 차례 장염과 감기로 지독한 밤을 보내야 할 때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밤새 나를 간호해주셨다.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그냥 “엄마”라고만 말하면 됐다.
학교도 다른 두 남매를 엄마는 매일 아침 간단한 요깃거리를 뒷좌석에 밀어 넣으시고 차로 태워다 주셨다. 학교가 마치면 학원으로, 그다음엔 집으로 우리를 데려오셨다. 엄마의 총알 운전 실력은 우리 남매의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걸쳐 쌓인 것이다. 정말이지 당시 엄마는 운전을 정말 잘하셨다. 교통 체증 속에서도 유독 엄마가 운전하는 차는 수많은 차량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길을 만들어냈다. 운전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손은 장시간 햇빛에 노출돼 거무스름한 잡티가 많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느 날 문득 엄마의 손을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 엄마의 손이 딱 그랬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아빠와 누나, 나에게 제각기 밥을 차려주시고 매번 설거지까지… 하루에도 열댓 번 넘게 손에 물을 묻히시다 보니 엄마의 손은 습진으로 가득해있었다. 보습에 좋은 핸드크림을 선물했다. 엄마는 아까워서 어떻게 쓰겠냐며 극소량을 손에 넓게 펴 바르셨다.
요즘 엄마는 무거운 것을 잘 들지 못하신다. 앉았다가 일어나실 땐 무릎 통증을 느끼신다. 예전과 다르게 생채기가 빨리 아물지 않는다. 눈도 침침하시다고 한다. 불사의 존재인 엄마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쇠약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세월 앞에 걱정 섞인 하루가 또 지나간다. 그리고 오늘은 남은 날들 중에 가장 젊은 날이겠지. 맞는 말이지만, 말했듯이 참 싫어하는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이 말을 하는 게 싫다. 난 끝까지 나만 생각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