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회동 Dec 13. 2018

술을 마주하면

취중진서[醉中眞書]

 녹색 병을 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한 녀석이 떠오른다. 중학교 친구 놈인데 술이 어찌나 세던지 그 녀석은 한번 마셨다 하면 혼자서 거뜬히 서너 병은 비우곤 했다. 나는 술을 잘하지 못한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게지고, 반 병을 넘어가면 몸을 가누기 힘들어진다. 이런 나를 보고 친구 놈은 사내 녀석이 술을 그리 못해서 되겠냐고, 덩칫값 좀 하라며 내 잔에 자꾸만 술을 가득 따라준다. 그렇다고 그 녀석이 싫진 않다. 그가 왜 술을 마시는지, 아니 왜 마셔야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어느 날, 그에게 전화가 왔다. 오래간만의 연락이라 반갑게 받았거늘, 늘 그렇듯 친구의 목소리는 취해있었다. 술만 마시면 전화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힘든 통화가 되겠군. 나오라는 말에 할 일이 태산이라며 핑계를 댔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단박에 알겠다, 며 끊는 그의 목소리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나는 그렇게 밤 11시에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세상이 밉다고 했다. 뭐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고 했다. 사업에 실패하신 아버지, 자꾸만 밖으로 돈을 쓰시는 어머니, 가출을 일삼는 중학교 동생… 당시 친구는 생활비는커녕 당장 집세와 전기세를 내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스무 살에 갓 들어간 학교를 그만두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가며 돈을 벌어야 했던 녀석이다. 그렇게 두 해를 넘기는 동안 그는 술병을 헤아릴 수 없이 비워왔다. 힘든 상황에서도 술 한 잔 기울이며 언젠간 좋아지겠지, 웃으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는 그날 없었다. 급한 불을 꺼도 그 뒤에 도사리는 빚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작곡가의 꿈은 접은 지 오래였다.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그에게 꿈이란 사치였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노래를 흥얼거릴 때 친구는 가장 행복해 보였다. 영롱하게 빛나던 그의 눈빛은 이후 몇 년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는 먼지 덮인 한낱 오래된 꿈일 뿐, 친구는 안정적으로 먹고사는 게 지금의 가장 큰 소망이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물두 살 청춘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덩달아 세상이 미웠다. 누구보다 그의 꿈을 응원했던 친구로서,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상황이 무엇보다 야속했다.


 해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건네야 위안이 될까. 내 머리로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평범하게 살기엔 친구는 너무 어린 나이에 많은 짐을 이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꾸만 비워지는 그의 술잔을 가득 채워주는 것뿐이었다. 친구는 세상이 밉다는 말만 반복하며 연거푸 술을 마셨다. 충분히 취한 것 같았지만 차마 그만 마시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기댈 곳은 머리 아픈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술뿐이라는 걸 잘 알기에. 결국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친구를 택시 태워 보냈다. 기사님에게 나지막하게 주소를 말하는 그의 옆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친구와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는 지역이 달라지고 서로 바빠지면서 연락이 뜸해지다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날 이후 그가 무엇을 하며 사는지 난 모른다. 지금도 혹시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쩌면 친구의 사정은 내겐 가슴 깊숙이 체감하긴 어려운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공감되지만,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고 사고 싶은 것을 살 수 있는 나로선 계속해서 악순환만 되는 그의 상황이 쉽게 와 닿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그에게 쉽사리 전화를 걸지 못하는 이유다. 핑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술을 마주할 때마다 녀석이 떠오른다. 가끔 그가 생각날 땐 혼자 술을 마시곤 한다. 그의 불우한 청춘이 안타까워 한 잔 마시고, 그의 피지 못한 꿈이 아쉬워서 한 잔 마시고, 또 힘들 때 계속 옆에 있어주지 못한 내가 미워 한 잔 마신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계속 술을 마시다 보면 언젠가 그가 느꼈던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않을까. 기대가 뒤섞인 죄책감이다. 술기운에 이런 글을 쓰면서도 끝끝내 연락하지 못할 것을 아는 나는, 참으로 비열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용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