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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Dec 27. 2021

시작의 순간들

2021 한 해 돌아보기, 나만의 반짝이는 순간

냉장고를 열었더니 정기 배송된 우유들이 줄 세워져 있다. 유통기한이 가장 가까운 것을 집어 들려는데 문득 1월 1일이라고 적힌 우유 팩이 눈에 들어온다. 벌써 그렇게나 됐나? 눈도 달리지 않은 우유 팩이 "정말 좀 있으면 새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시즌 머그잔에 담는다. 마음만큼은 빨간빛과 초록빛이 가득한 거리에 있는 듯하다. 우유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니, 흐려진 하늘에 일 년이라는 시간이 연기처럼 지나가는 것 같다.



찬찬히 돌아보면 지난 이십 대의 연말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색색의 전구들로 장식된 도시의 거리나 여행지들을 누비며 연말·연초 시즌을 보냈다. 아끼는 사람들을 옆에 꼭 끼고, 우리 올해도 즐거웠지! 라며 어떤 잔이든 마구 부딪혔다. 한 해를 잘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마음에서 매일을 모임으로 채웠다. 그러나 새해가 시작된 줄도 모르고 바쁘게 떠들던 날들이 훨씬 많았음을, 그리고 그 왁자지껄함을 몹시 사랑했음을 기억한다.  


새롭게 태어난 나는 연말이 성큼 다가왔음을 냉장고 속 우유 팩으로 알게 되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역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난 날들과는 다르게 밖으로 나가 축포를 터뜨리기보다는 조금 더 나 자신 속으로 파고들고 싶어진다. 1월 1일이라고 적힌 우유 팩을 반가움과 안도의 미소로 내려두고 한 해를 톺아본다. 


회복하는 일 년을 보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연말 시상식처럼 어떤 일이 가장 크고 많은 성취를 해냈느냐, 가 아니다. 내 마음속 연말 파티에서 가장 주목받는 순간은 '시작의 순간'들이다. 아픔의 흔적이 때처럼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내가, 두려워하는 나를 꼬옥 껴안고 첫발을 내디딘 순간들. 

2월 초에는 출판사 대표님께 수술 후 근황을 알리며 메일을 보냈다. 이제 슬슬 원고 다시 써볼까 싶어요, 라고. 대표님의 답장에는 다정이 뚝뚝 흘러넘쳤다.

"작가님이 즐거운 만큼만 천천히 시작해보셔요. 책은 아주 중요하지만, 책보다 중요한 건 많으니까요." 

힘들이지 않고, 애쓰지 않고 내 몸과 마음이 즐거울 수 있을 만큼만 해도 좋다는 그의 격려가 오랜 온기로 남았다. 그 말에 내 마음에도 즐거움을 허락하기로 했다. 그만 두려워하고, 언제든 다시 멈춰도 좋으니까 즐거울 만큼은 무엇이든 시작해봐도 좋다고. 그렇게 시작한 일들이 쌓여 올해의 나를 만들었다. 


움트는 새싹처럼 몸에도 생명력이 피어오르던 봄에는, 용돈이라도 벌고 싶어서 과외를 시작했다. 열 달째 한 아이를 가르치며 나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프기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됐다. 코로나가 조금 주춤하던 초여름에는 용기를 내어 단골 카페에 가기 시작했다. 늘 조금씩은 문을 열어두던 카페였기 때문에 걱정을 내려놓고, 몸이 허락하는 만큼 앉아서 글을 썼다. 오래 아팠던 기록을 다시 살펴보며 이전의 나를 다시금 기억해냈다. 그때의 시작이 조금씩 쌓여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글쓰기 모임도, 바빠질 걸 알면서도 지난달의 내가 신이 나서 시작한 일이다. 이렇게 한 해를 함께 돌아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시작의 순간들에 있던 내가 지금의 내게 큰 선물을 준 것만 같다.


작년에 하나의 행동 모토를 만들었다. 오래 아픈 몸을 더 아프게 만들까봐, 혹은 이제 막 나아진 몸이 또다시 아파질까봐 두려워하는 스스로가 안타까워 만든 모토. "일단 해보고 후회하자"라는 것. 생각도 고민도 많아서 시작하지 못하는 내게,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올해의 유행어였던 '가보자고!'는 꽤나 강력한 도움닫기가 되어주었다. 물론 그렇게 시도하다가 이상한 변태 태권도 관장을 만나 불쾌했던 일화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이제는 웃음이 터지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마음에 드리운 그늘에 지지 않고 과거의 나는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시작한 일들이 나의 그늘을 하나 둘 걷어냈다. 작게 쌓아온 경험들이, 함께 해준 사람들이, 할 수 있다고 믿어준 내가 지난날들에 있다. 긴 어둠에서 나와 첫발을 뗀 시작의 순간들에 있다. 반짝이는 그 순간들을 떠올리며 고맙다고, 아주 잘 해냈다고 말해주고 싶다. 올해의 순간이라고 감히 명명하며 나를 한껏 기특해하고 싶다. 내년에도 내가 더 당찬 시작을 많이 만들어내면 좋겠다. 가끔은 과감하고 준비 없이 시작해도 그 일들이 분명 선물이 되어줄 것을 안다. 


따끈히 데웠던 우유를 마시며 발견한 시구를 여기 적어두고 싶다. 맑게 하얀 이 시를 오래 기억하며 이번 연말을 잘 나야지. 


새로운 달력을 하얀 벽에 건다.
다만 힘겹고 지친 혼자의 겨울이
얼마나 기쁜 축복의 봄을 데리고 올지 궁금하다.

                                  -새로운 달력을 걸며, 박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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