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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Feb 07. 2022

다시 잘 살아보고 싶어서

내 인생을 초라하게 만든 건 나 하나였나봐, 할머니.

    오늘은 또 아팠다. 증상이 없는 병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바로 위장. 독한 약을 10년 넘게 먹으며 나는 잘 체하는 사람이 되었다. 9년 전 한의원 원장님이 깨끗하게 먹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게 다 치기 어린 스물한 살의 내가 쌓아온 업보다. 이식 후에 평생 먹어야 하는 면역억제제는 죄 많은 내 위장을 자주 건드린다.


    아픈 사람은 아픈 것에 익숙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 매번 낯설고 서럽고, 이런 내가 아주 지겹다. (이번 글 모임에선 아픈 얘기를 쏙 빼고 쓰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실패다.*) 아픔 그 자체도 지겹기만, 아픈데도 맛있는 걸 먹고 싶은 내가 싫고, 더불어 그런 나를 싫어하는 나도 싫다. 아프면 오만 가지 이유로 내가 싫어지는 법이다.


    다만 이제는 제법 환자 경험치가 쌓여서 아픈 나도, 입맛이 도는 나도, 그런 나를 죽어라 싫어하는 나도 그러려니 할 수 있는 때가 왔다. 다 괜찮다고 안아줄 수는 없지만, 진상 친구를 보듯이 '아우 얘 또 이러네' 하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상황을 관조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진상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자, 온종일 미음 반 그릇, 생선전 두 조각, 미숫가루 한 잔을 겨우 마신 이에 의해 쓰이는 중이다. 과연 그 사연의 진상이 무엇인지 한 번 들어나 보자.


    관해기가 온 줄 알고 무모하게 꿈을 향해 가던 여름이었다. 로스쿨 입학시험을 위해 여름의 더위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스터디 모임을 했다. 같이 준비하는 친구 중에는 별명이 '스님'인 친구가 있었다. 아픈 나조차 사람들이 먹고 싶다고 하면 패스트푸드점에도 가고, 치킨집, 파스타 집에도 갔는데 그 친구는 모든 음식에 소스를 빼거나 덜어 먹고, 치킨의 튀김옷은 벗겨 먹었다. 절밥처럼 슴슴하게 밥을 먹는다 하여 스님으로 불렸다.


    며칠 체해서 고생하던 죄 많던 그때의 내가 그 애에게 대단하다고 말했다. 어쩜 그렇게 자기 조절을 잘하느냐고, 그런데 나 이따가 써브웨이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고. 같이 먹으려냐고. 그 친구는 웃으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언니, 우리는 그런 거 대신 꿈을 선택한 거잖아."

    결연한 그 애의 표정에 나는 그날 써브웨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대신 멍하니 "선택"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가진 것이 고작 이만큼이라고 탓하거나 속상해하지 않고,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선택. 문제 속 답안을 선택할 줄만 알았지, 어른답게 내가 나를 책임지는 선택이 가능하단 건 그때 처음으로 배웠다.


    선택이란 말은 때로 몹시 날카롭게 느껴진다. 내가 체한 건 내가 그 음식을 선택했기 때문일 테니까 오늘의 아픈 나도 결국 나의 업보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오랜 시간 환자 경험치를 획득하며 알게 된 사실은, '선택'이란 말을 소급 적용하지 않아야 건강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으니 그대로 둔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픈 나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만 생각하기로 한다. 이렇게 위장이 성을 내는 날에는 되도록 적게, 따뜻하게, 깨끗한 음식을 먹고 오늘의 할 일이든 미뤄두었던 어제의 일이든 모든 것을 잊고 푹 쉬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은 내일의 할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아픈 몸에 찾아오는 나쁜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드라마를 이어 봤다. 드라마에는 나와 비슷한 연수가 있었다. 닥친 현실이 몹시 서글퍼서, 아등바등 매일을 살며 '제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가난했으면 좋겠다'고 울면서 말하던 연수는 할머니의 등을 끌어안고 말했다.

    "내 인생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꽤 괜찮은 순간들이 있었어. 내 인생을 초라하게 만든 건, 나 하나였나봐, 할머니."*

    내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지 선택하는 것. 주어진 현실이 가혹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오늘은 다시 일어서기로,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하는 선택. 나는 매일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기로 선택한다.


    사실 오늘은 아주 많이 울고 싶었고, 아픈 내가 쓸모없어 보였고, 이런 몸으로 나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을지 퍽 고민스러웠다.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날카로운 생각들을 붙잡지 않기로 선택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애쓸 힘이 있었던 건, 분명 내일 아침에는 오뚝이처럼 침대에서 튀어 오를 나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픔일랑 모르는 것처럼 씩씩하게 하루를 살아내겠지.


    이 글을 조금 쓰다 보니 힘이 나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몸에 훈훈한 기운이 돌면서, 나는 다시 잘살아 보고 싶어졌다. 내일도 또 아플지도 모르지만, 그때도 분명 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드라마는 <그해 우리는> 입니다.

*제가 진행하는 "글로 만난 사이" 글 모임에서 쓰인 글입니다. 글감은 "나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요소"였어요. 여러분들을 여러분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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