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남자는 정처 없이 걷다 가장 밝은 별 아래에 있는 빛을 본다. 그리고 육지의 끝자락,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이 이어진 맨 꼭대기의 건물로 향한다. 한 걸음씩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물을 흠뻑 먹은 신발 탓인가 물속을 걷는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짙게 깔린 안개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비 탓에 주변은 오백년 묵은 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흐릿하다.
빗소리가 잦아들 때쯤 계단의 끝에 다다른다.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본다. 빛을 등지고 지금까지 올라온 계단을 내려다본다. 지나온 생의 불씨가 재로 변하더니 먼발치에서 도깨비불이 되어 멀어진다.
문손잡이를 밀어 안으로 들어간다. 눈동자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흡수한다.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일깨운다. 술집이다. 오랜 시간 습기를 먹은 나무에서 나는 냄새가 위스키 향과 섞여 거대한 오크통에 들어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때 자주 가던 술집을 떠올렸다. 만취 상태로 집에 가려다 아쉬운 마음에 자연스레 발길이 향하는 곳, 연어가 산란을 위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듯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란 사람의 부고를 듣고 찾게 된 고향의 흙냄새처럼.
낯설지만 익숙한 이 느낌. 그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몇 번의 환생을 거듭해 지금의 자신이 되었을까-하는 의문이 들 때면, 어느새 이곳에 와 있다.
창밖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슬보슬 옅은 비가 내린다. 그가 입은 핏빛 벨벳 양복은 비를 맞고 길거리에 널브러진 죽은 고양이와 닮았다. 게다가 신발은 어디에서 잃어버렸을까. 맨발이다. 그것도 물에 불어 퉁퉁 부은 모습이다. 다행히 나무 바닥이라 발이 시렵지는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주인을 불러본다. 대답이 없다. 벽난로의 장작이 이제 막 피워지고 있던 터였다. 1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소파의 주인은 방금 자리를 떴는지 온기가 남아있었다. 창문 틈으로 바람의 숨소리가 오래된 자장가처럼 들리는 듯했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들으며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쉰다. 그는 내려앉는 눈꺼풀을 몇 번이나 뜨려다 실패하고 달콤한 잠에 빠져든다.
장작은 꺼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창백한 빛을 발하는 손이 나타나 새 장작을 얹었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어 있는 맨발의 남자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창백한 손이 맨발 남자의 옷깃을 스쳤다. 맨발의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면 잠에서 깨어났다. 지독한 악몽에서 벌떡 일어난 모습 이였다.
약해지던 불씨는 새로운 장작을 만나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맨발의 남자는 잠시 몸을 움츠렸다. 좀 전의 한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모습이다.
주인인 듯한 창백한 피부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 내가 준 선물은 잘 받았나. 그곳에서의 여정은 만족스러웠나”
“선물이요? 무슨 선물 말입니까?” 맨발의 남자는 잔뜩 무거워진 몸을 천천히 곧추새우며 말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걸 마시면 기억이 날 걸세. 자네를 위해 벌써 준비해 두었지. 드디어 오늘이 오고야 말았네.” 검은 양복의 사내는 맨발의 남자 앞에 위스키를 꺼내어 한 잔 대접했다.
“자네의 99세 인생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했지. 나에게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야. 이제 은퇴할 수 있게 되었거든.”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신고 있던 검은 구두를 벗어 맨발의 남자에게 신겨주었다. 이상하리만치 구두가 꼭 맞았다. 검은 양복 사내는 드디어 맞는 주인을 찾았다며 흡족해했다. 잠시 뒤 그의 산송장 같았던 창백한 피부가 살아있는 사람의 가죽처럼 변모했다.
맨발의 남자에서 구두 신은 남자가 된 그는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재빨리 99년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 연달아 두 모금을 더 삼켰다. 목구멍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삼킨 듯한 타오름이 느껴졌다. 한기는 즉시 사라졌지만 불쾌한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구두 신은 남자는 생각했다. 살면서 99년산 위스키를 마셔 본 적이 있었던가. 얼만큼의 부를 쌓아야 마실 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런 중세시대에 있을 법한 허름한 술집에서 고가의 위스키를 판매한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무엇보다 그 맛은 정말이지... 살면서 이렇게 맛없는 위스키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나고야 말았다. 이곳이 첫 방문이 아니라는 것을... 이번이 두 번째다. 아니다. 정확히 9번째다.
“죽음은 사실 생의 선물이기도 해. 생을 다한 죽음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지
간혹 만개하려다 만 어린 생들도 있지만. 그건 나도 안타까운 부분이라네.
우리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이 아니야. 인간과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사는 탓에 공감 능력이 결여 된 것처럼 보일 뿐.
우리에게도 인간과 닮은 슬픔이 있어. 자네도 곧 차차 알게 되겠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던 검은 양복의 사내는 순간 멈칫했다. 그의 몸은 점점 이 술집의 배경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몸 상반신에 이어 남은 얼굴 반쪽까지 희미해져
결국엔 사라지는 것을 본다. 눈과 코는 그 형체가 완전히 사라져 구멍만 남았다. 마지막 말을 하던 그의 입에서 물기처럼 남아있던 온기가 사라졌다. 점점 쪼그라드는 잎사귀처럼 되어있었다.
“당신... 영생의 삶을 살아보고 싶다 했지. 일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계약에는 조건이 있소.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
검은 양복의 사내는 어느새 말라비틀어진 잎, 아니 솔방울 비슷한 어떤 물건이 되어 바닥에 가볍게 떨어진다. 그의 영혼은 벽난로의 불꽃이 되어 그들과 섞인다. 흔들리는 불꽃 그림자는 소파에 앉아있는 구두 신은 남자를 향해 춤을 춘다.
구두 신은 남자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선잠에 빠진다. 그는 물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의 상태에 빠진다. 밖에서 자신을 향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한바탕 해괴망측한 꿈을 꾸고 눈을 떴다. 벽난로의 장작은 하얗게 불에 타 재만 남았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꿈에서 본 솔방울이 쥐어져 있다. 그는 솔방울을 술집 계산대 옆 유리병 안에 쌓여있는 지폐들 사이에 함께 구겨 넣는다.
저 멀리 어딘가로부터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찢어질 듯한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일하러 갈 시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