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진 Dec 14. 2016

간호를 위하여

말끔히 선이 떨어지는 네이비색 남방과 흰 가디건,

접어놓은 시간을 따라 곧게 뻗은 바지,

단정히 말아올린 머리.


실습이 시작되던 3월 첫날,

우리들의 모습은 그랬다

겨우내 채 녹지 않은 얼음처럼

바짝 긴장해 하얗게 질려있던 우리.


그리고 세 계절이 지난 후,

겨울의 우리는 이토록 다르다.

남방과 가디건은 선을 잃고 흐물거리고

바지밑단은 걸음마다 휘청대기 일쑤

머리카락을 동여매던 리본망도

오늘은 덜컥 고장나고 말았다.


담아두기엔 너무 벅찬 오백여 시간의 기억들이므로

여기에 우리들의 실습을 기록해두자면,


병원은 결국

가슴에 슬픔 하나 가둔 사람들이 사는 곳.


환자들이 제 삶을 담보로 병마와 싸우듯

간호사는 차가워지지 않기 위해

비좁은 절망과 체념에 속지 않기 위해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를 슬픔을 함께 살아내기 위해 싸운다.


적어도 내가 짧은 시간이나마

열렬히 고민하고 살아낸

시간들의 결실은 이렇다.


누구는 여전히 간호사를 의사의 하수인으로,

성적 희롱의 표상으로,

거대 병원의 소모품쯤으로 여길지 몰라도


우리가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우리 스스로는 꿋꿋이

진짜 돌봄의 길을 가리라 마음 먹는 다면

그런 시선은 결코 상처나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럴수록

인류를 위한 사랑과 꿈에는

실패하지 않으려 들테니까.


오직 내가 사랑하는 것들만이

나를 상처입힐 수 있다.

그러니까 조금은

덜 무서워하고 덜 겁내면서 걷기로 하기.

우리는 느려도 올바로 가고 있으므로.


- 1년, 500시간의 3학년 실습을 마치며

작가의 이전글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