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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Aug 13. 2018

08.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 수 있는 것

지하철을 탄다. 손가락 마디 사이에 시집 한 권을 끼고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한다. 평범 속에 숨는 법은 이렇게나 쉽다. 일터에 가면 성품이 그럭저럭한 사람들을 만난다. 틀어박히는 비수가 아니라 흘러가는 잔잔한 하루들. 반갑다가도 가끔은 공허하다. 두 번째 직장에 출근한 지도 한달이 지났다.
 
사월의 상흔은 꽤 오래 남았다. 다그치는 눈빛은 여전히 거칠고, 습관처럼 겁이 솟는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 견고하게 침묵한다는 것. 연한 눈꼬리를 지으며, 이상을 더욱 깊숙이 숨기고 지켜낸다는 것. 흰 양의 갈비뼈 사이에도 붉은 피가 흐르듯 내 안에도 이렇게나 애끓는 꿈들이 헐떡인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조용히 몸을 낮추고 서툰 보폭으로 걸으며 낮은 바닥 위에 묵묵히 자리를 잡는다. 이 '기꺼이'의 세계를 견디고 나야 겨우 노을은 찾아 온다.

오늘 저녁도 과일을 파는 상점을 지났다. 어제는 이천 오백 원이었던 바나나가 오늘은 이천 원이다. 오십대 후반 쯤으로 보이는 주인 남자는 꽤 애가 탔나 보다. 하루 더 늙어갈 바나나의 시간은 오백 원 저렴해지는 형태로 흘러간다. 갈색 반점이 드는 채로 속부터 저미어 드는 것들. 나는 바나나와, 바나나를 지켜보는 그 주인 남자의 슬픈 셈법에 마음이 동하면서도, 서둘러 횡단보도를 건넌다. 

군더더기 없는 사실을 말하자면 신규 간호사였던 나는 몇 달 사이에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는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두 문장 사이에 '아직은'이 놓일지, '다시는'이 놓일지 지금은 가늠이 되지도 않고 섣불리 희망이나 절망을 품기가 꺼려진다. 그래서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병원에 두고 온 환자들이, 끝까지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들이, 4년 내내 임상 간호사를 꿈꾸던 학부생 시절의 내가, 집에 돌아오는 길목마다 떠올랐다. 패배, 라고 입술을 읊조리면 조금은 억울했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니까, 여전히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라도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던 나는 어느 곳에 있든 포기했던 것들을 지키고 되찾아야 했고 신입 사원이 되었다. 간호 사회와 관련이 깊은 직장에 들어왔다며 머쓱한 소개를 할 뿐이다. 

아직도 나는 대학병원의 동기로부터 병원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름만 '선배'인 사람에게 신체 일부를 꼬집혔다거나, 입천장을 데이며 컵라면을 들이킨 이야기. 그런 급성기의 환경 속에서도 한 차례 IV에 성공하면 크게 행복해하고 스스로를 다독여주는 이야기.

햇병아리 같았던 그들이 한 사람의 몫이라도 해내려고 애쓰는 시절들을 보고 있노라면 감히 청춘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그게 좋아서, 아직도 스스로를 이방인이라 말하지 못하고 우리라고 일컫는다. 무언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아직도 전국에는 고충을 겪었거나 겪고 있고, 벗어날 길 없는 패배감으로 그저 견디고만 있는 간호사들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더욱 조심히 사과를 건넨다. 끝까지 병원에 남지 못한 사람이라서, 사과를 한다. 그리고, 약속을 한다. 이 곳에서도, 우리들을 지킬 수 있는 일을 해 나가겠다고.

여기서는 대학 교수니, 간호 팀장이니, 협회장이니,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을 볼 기회가 많다. '우리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아까 말한 두고 온 얼굴들이 계속 생각 난다. 문제는 신규 간호사들이 적응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결코 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문제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비릿하고 쓰라린 현실이 미워지면서도, 돌아오는 밤에는 어느 먼 초원에 살았던 아기 양을 생각한다. 동이 틀 무렵, 거대한 산을 오르기 시작한 아기 양의 뒷다리와 달싹이는 가슴뼈를 눈 앞에 그린다. 어미를 잃었을지도 모르는 그 존재 앞에서 다시 내일은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그 어른들처럼 똑같이 위선을 휘두르거나 가시적인 권위에 굴복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더는 잃을 수가 없고 더는 배신할 수가 없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보상심리만으로 살아가기도 싫다. 끝내 얻어내고 믿음을 주는 게 재취업을 고민하던 시기에 내가 배우고 지켜가기로 마음 먹은 유일한 어른의 태도다. 누군가 이런 나를 믿어줄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 만큼으로 멈추지는 않을 거다. 나는 네게 줄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며 끝까지 이겨서 이루어 낼테니. 

밤 아홉시까지 땀 흘리며 남의 에어컨을 고치러 다니는 기사 아저씨나
너무 더워서 철문을 열고 나와 가만히 숨을 고르는 골목길 할머니
홀로 책가방을 휘두르며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작은 꼬마 아이.

내가 사랑하는 세계는 이런 얼굴들.
그 외에 어떤 것도 나를 상처줄 수는 없다.

너를 상처입힐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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