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이 곳이 앉아서 글을 쓰고 있으면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꽤 다행스러운 습관이라고 생각하며 쓰지 않던 날들의 불안감을 씻어낸다. 담담하게 윤곽이 잡혀 나가는 마지막에야 안도감을 느낀다. 여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대략 6월부터 8월까지의 날들'이라는 말이 적당하다. 내게 안도감이란 이것과 비슷하다. '손가락에 꼽을 만큼의 글이라도 쓴 상태'. 이 사실 하나로 불신과 회의는 스산한 바람을 멈춘다.
바라던 병원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집과 거리는 멀지만,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고 신체와 질병을 가늠하기에 앞서 발달과 자립에 관심을 갖는 곳이다. 아직 발령을 대기 중인 나로서는 실제 간호사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처지가 되면 또 다를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자처한 고통이라면 조금 더 너그러울 수 있다. 움츠러드는 손가락을 펴서 조언과 훈계들을 툭툭 털어낸다. "너는 아직 현실을 한참 몰라. 지난 번 처럼 실망하게 될꺼야."라는.. 차갑지만, 따스함을 발견하면 또 그런대로 들을 만한 말들이다. 일 년 전에는 얼굴이 붉어져 목소리를 높였을 말인데 요즘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고 시야를 고정한다. 동해바다의 수평선을 애써 머릿속에 그린다. 속으로 천천히 음절들을 헤아린다.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럼 어떤 준비를 할 수 있고, 해야 하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말. 확신은 없었어도 할 수 있는 게 노력 밖에 없어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의미의 문장. 한 번 떨어진 병원이었지만, 체념을 견딜 수 없어서 침대에서 일어나 무슨 일이라도 했던 월요일 새벽을 기억한다. 그 때 내가 한 것은 그저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장문의 편지였지만, 그 아무것으로 인해 나는 한 번 더 기회를 얻었고, 바라던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체념에 잠식당했던 때에는 현관문을 열고 나갈 자신이 없어서 보고 싶은 사람과의 약속도 핑계를 대며 미루었다. 그에게 걱정을 끼쳐서라도 위로받고 싶었던 어린 내가 다시 그들을 만나기로 마음 먹었던 것도 결국은 그 별 것 아닌 것이 주는 안도감이었다. 밤이면 '진진, 행복해야 돼'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그저 무너진 상태로 떠나보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끔 무척 버거울 때면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그저 아무 것이라도 하는 거다.
내려놓으면 더 잘할 때도 있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은 사실 몇 명만 있어도 된다.
슬픈 노래는 실은 행복하려는 창작자들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니 잘하려고, 눈에 들려고, 구태여 슬퍼지려고 애쓰지 말자는 생각.
잠시 고향에 내려갔을 때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썼던 글이 상을 받았다. 아버지가 티는 안내셨어도 친척들 모두에게 자랑하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행스럽고 기뻤다. 그동안 수십 명의 인사팀 직원들로부터 탈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었는데 의외로 쉽게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실은 이렇게 몇 명만 있어주면 되는 거였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
모쪼록,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간호를 할 수 있다는 사실, 다시 살리는 일기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을 다 안아줄 만큼 기쁘다. 우리는 끊임없이 회의와 맞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뇌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는 뜻 아닌가. 그렇게 여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