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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진 May 19. 2018

06. 세상이 배신했다고 느낄 때



현관문에 붙는 전기세, 수도세며 월세 고지서를 마주할 때마다
벌이가 없는 형편을 실감한다.
집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한 손은
고지서들을 잡아채기를 꺼린다.
그걸 가지고 가기가 힘이 들때마다
차라리 내일 아침에 도망치듯 수거해 가는 게 낫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종이 한 장에 전전긍긍하며 신경 쓸 일을 하루 더 미루는 나'서울에 사는 가난한 청년 실업자'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을 거다.

그게 바깥이 정해준 나다운, 내가 누릴 수 있는 서울에서의 생활이다.
퇴사 이후 '그들'이 말했던 쉽지 않은 세상이다.
열심히 살아와서 뿌듯했던 대학교 졸업장,
어렵게 지켜낸 맑고 정연한 신념,
담담하게 써내려갔던 이력서들 열 몇 개.

하지만 탈락이었다.
신입을 뽑겠다고 버젓이 채용 공고에 써놓고는
신입이라서 고민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그게 탈락일까, 보류일까, 아니면 다시 희망일까를 골몰하다가
연거푸 같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에는 그냥 탈락이라고 믿고 툴툴 털고 일어나는 어떤 날들이 있었다.


나는 망해 가는 걸까?
‘세상이 나를 배신했어’라고 혼잣말을 내뱉으면,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
태풍이 몰아칠거라는 예보를 들은 사람은 짧은 장마 정도에는 심적인 평온을 느낀다.
지금의 나도 앞으로의 더욱 큰 배신들을 감내하기 위해 그런 허풍이나 요란을 떠는 지도 모른다.
세상 전부가 배신한 것 치고는 꽤 잘 살고 있잖아, 하는 겸연쩍은 미소. 쓸어내리는 마음. 빗줄기가 내어주는 품. 깊고 넓은 안식.

"너 아직 사직하고 한 달 밖에 안지났잖아?"
불안하다고 말하면, 친구는 시간을 끌어와 나를 위로해주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연이은 탈락을 모른척 해주는 네게 살뜰함을 느끼면서도
원래 불안에 취약한 성격을 어쩔 수는 없었다.


봄 밤의 거리를 저벅이면, 적어도 이 테두리 안에서는 귀퉁이를 채우는 일원이 된다.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이 배신했다는 말에 대하여.
그 엄청나고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낸 스스로에 대하여.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은 건 아닌지 물어본다.
정말 세상 전체가 너를 배신했느냐고, 그렇다면 앞으로 그것을 등지고 살아갈 자신이 있느냐고.


나는 덜컥 겁도 나고 부끄러워져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함부로 세상에 대한 애정을 놓으려고 한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빈다. 봄 밤에 홀로 핀 두 송이 진달래나 보면서 쉽게 포기하는 일들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불행은 사람들마다 다른 모양과 깊이를 가지고 있고 심장을 타격하는 강도도 다르다. 그러므로 누구의 불행이 더 크거나 더 작다고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늠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불행들은 언제나 있다. 예를 들면, 누구나 살면서 보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경제적 위기나, 신체 일부 혹은 자존감의 상실 같은 것들.


삶이 고단할 때마다 내가 겪지 못한 더욱 큰 불행들을 떠올린다. 그 불행을 안고 사는 이들을 눈앞에 그린다. 비가 철철 내리는 도로가에서 폐지를 줍는, 걸음이 느린 할머니, 할아버지들. 어느 다큐에선가 보았던 생계를 책임지는 소녀와 소년. 무당의 길을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괴로워하는 오랜 지인. 그러나 이 사람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내 불행을 위로받으려거나 그들의 삶을 동정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견뎌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면, 한 번 더 겸손해진다. 살아볼 용기가 난다. 그래서 떠올린다. 이들은 적어도 세상이 자기를 배신했다고 외치지는 않는다. 완연히 슬플 줄 알고 또 원숙하게 가벼워진다. 쉽게 세상을 탓하는 사람들보다 '그럼에도 세상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멋지다. 내게는 앞의 사람들이 그러하고, 할 수 만 있다면 품을 나누고 싶을 만큼 더 함께이기를 원한다.


그들은 피하지 않고 껴안고 뒹굴며 살아간다. 비록 아직은 내가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늘 떠올리고 찾아내고 인정하려고는 애쓰고 있다. 잘해줄 수 있는 날을 꿈꾸다 보면, 포기도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들은 사라진다. 또 불행한 누군가가, 내 글에서 빛을 느끼고 나처럼 다짐하게 될 수 도 있으니까.


자정이 넘은 시각, 벽에 기대서 굽은 등을 하고 자판을 두드린다.
그러면 창문 밖에서 가로등 어귀마다 나직한 발걸음들이 들려오고 사라진다. 딴에는 오토바이 소리, 머나먼 대로변의 경적 소리 넘어넘어 들려오고, 어떤 식당에서는 아직 하얀 식기들이 부딪힌다. 유리창 표면으로는 둥그렇게 굴절되어 퍼뜨려진 내 방의 불빛. 모두가 이렇게나 선명하게 건재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한 분명 존재하고 있는 이 시대의 작은 것들. 나라는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이 작은 것들. 세상 안에는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고, 단어들이 있어주는 한 세상이 나를 배신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다. 열 번의 호흡을 하는 동안 여전히 오월의 밤은 소리로써, 불빛으로써 우주에서 내가 살고 있음을 증명해준다. 그래, 그렇다면 아직 세상 전부가 나를 배신했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내일은 운동을 하고 돌아와 빼먹지 말고 진달래 두 송이를 구경하러 가야겠다. 밤에 홀로 보면 새롭고 예쁘다.

아, 그러니까 나는 망해가는 것이 아니다.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망하면 또 어떻고 잘못되면 또 어쩔건가. 작은 불행으로 인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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