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돌본다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방법

by 달의 깃털

알콩이가 구내염으로 인해 발치수술을 한지가 두 달 여가 되어간다.


그동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줄곧 지켜보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발치를 했다고 해서 구내염이 100% 낫는 걸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한 달은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아 보였는데, 이내 구내염이 재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토록 간절히 기도했건만, 나의 간절함이 하늘에 가 닿지 못한 셈이다.


캣맘을 자처한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구내염에 걸린 아이를 바라볼 때다. 다른 질병도 고통스럽겠지만, 내가 알아채기 쉽진 않다. 구내염이 심할 때 고양이들은 앞발로 스스로의 입을 치고,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한다. 설상가상, 구내염에 걸리면 쉽게 죽지도 않는다. 길냥이들을 살리기 위해 밥을 주는 내가, 제발 저 아이를 거두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리게 된다. 구내염은 정말이지 악마 같은 질병이다.


알콩이.jpg 새벽6시, 좀전까지 자다가도 통조림을 곧 잘 먹는다

발치까지 했는데, 케어도 불가능한(손을 타지 않는) 아이에게 내가 더 해줄 것이 없다. 해줄 수 있는 건, 항생제를 먹이고, 그 마저도 차도가 없으면 면역억제제 같은 걸(효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더하는 일뿐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른 아침 통조림 먹는 것이 습관이 된 데다, 아파서 보일러실 근처를 벗어나지 않고,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 항생제를 섞은 통조림을 잘 먹는다는 사실이다(입맛이 까다로워 먹지 않는 아이도 있다).


알콩이.jpg 8년 전 아직 젓살이 붙은 아기 알콩이와 엄마 알록이의 사진

항생제 투여 일주일 차, 알콩이의 상태가 조금 좋아졌다. 항생제가 구내염을 낫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빠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마냥 기쁘지만은 않지만, 어쨌든 한 시름 놓았다.


재발한 알콩이 때문에 심난할 무렵, 서서히 강이가(뒤뜰냥이 붙박이 8년 차) 안 보이기 시작한다. 새벽마다 통조림을 먹으려고 자기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여서,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무지개다리를 건넌 게 아닐까 하고). 꾸준히 지켜보니, 수년을 잤던 집을 버리고(?) 어디 다른 데서 자는 모양새다(낮에는 뒤뜰에 있다). 강이는 오랫 동안 이 집을 떠난 적이 없다. 멀리 가는 것도 본 일이 없다. 아침마다 내 통조림을 얻어먹은 것이 벌써 수년째인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싶다.(통조림과 집을 동시에 버렸다고?)


알콩이.jpg 알콩이의 남은 삶이 고통뿐인 것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추워지면서, 통조림 데이트를 하던 초롱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뿐이랴. 매일 통조림을 얻얻어먹던 요미도 요새는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보기도 쉽지 않다. 통조림값에 (과장을 보태) 등허리가 휘던 나는 마당쇠에게 농담을 건네본다. "얘네들이 내 통조림값을 아껴주려고 그러나 봐" 하고.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알콩이 수술비의 여파가 가시지 않아서 '돈이 없다'를 입에 달고 살았더니, 진짜 얘네들이 어멍 통조림값 아껴주려고 그러나 하는.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건 잘 안다. 강이도 강이만의 사정이 있어 집을 떠났을 테고, 다른 아이들도 추워진 날씨 탓에 게을러진 까닭이 클 것이다(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초롱이는 어쩌면 무지개다리를 건넜는지도). 그래도 왠지 나는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이들이 내 주머니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약값이 들게 생겼으니 통조림값이라도 줄여주려고 하는 것 아닐까. 다 같이 알콩이를 살리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그저 우연에 우연이 더해진 결과값이라고 해도, 나는 왠지 그렇게 믿고 싶다.


강이2.jpg 가까이서 보면 너무나도 이쁜 강이, 통조림 얻어먹은 지 수년채인데 나와 여전히 친하지 않음

뒤뜰에 고양이 급식소를 처음 설치하던 9년여 전, 나는 몹시 마음이 힘든 상태였다. 평생 함께 할 거라고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나름(?) 배신을 당한 처지였고, 그 배신이 너무 뼈아팠다. 차마 생목숨을 끊을 용기가 없어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신명 나는 일이 통 없었다. 남자친구에게 차인 것이 7월이었고, 그해 9월에 뭉치를 만났다. 그리고 줄줄이 알록이(알콩이 엄마)를 만났고 다음 해엔 태희네 6남매와, 예삐네 3남매를 만났다. 생각해 보면 내 집 뒤뜰에서 길냥이 새끼들이 연속적으로 태어나고, 아픈 아이를 치료해야 하는 스펙터클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때 그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마당 있는 집 살이가 재밌기만 했을까. 어쩌면 그 시절 죽어가던 나를 살린 건, 뒤뜰의 고양이들이 아니었을까. 고양이들이 나를 살리고, 나는 또 고양이들을 살리고, 이제는 어쩌면 길냥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돌봄의 선순환이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누군가를 돌보고, 돌봄을 받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의 결과값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초롱이.jpg 날이 따뜻해지면 초롱이가 통조림을 얻어먹으러 다시 돌아올거라 믿어본다

아픈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일이 때론 감당하기 벅차다. 길냥이들의 고통을 마주하는 일이 버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저 아이들이 나를 살게 하고, 또 내가 저 아이들을 살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8년이나 함께 한 알콩이와 나 사이의 무엇,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손 끝조차 허락하지 않는 아이의 안녕을 간절히 기원하는 내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내게 작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나의 선의가 누군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좋다.
더불어 그 마음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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