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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ul 27. 2020

너를 위한, 단 한 사람

심리적 안전기지가 있다는 것



육아서를 읽다 보면 회복탄력성이란 단어가 자주 보인다. 회복탄력성이란 역경에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음근육을 의미한다. 원어로는 resilience 즉 탄성이란 뜻이다. 시련과 실패를 겪었을 때 회복탄력성이 약한 사람은 무너져내리고 회복탄력성이 강한 사람은 역경을 발판 삼아 더 높이 뛰어오를 수 있다고 한다. 


아이에게도 회복탄력성을 길러주는 게 너무 중요하다는데, 이 멋진 능력은 어떻게 길러주는 걸까? 혼자서 시련을 겪고 이겨내도록 해야 하나? 빡세게 자기조절력을 훈련시켜야 하나? 물론 이것들도 맞는 얘기다. 실제로 회복탄력성 검사에는 자기조절력이 포함된다. 그치만 놀랍게도 회복탄력성이라는 개념은 유의미한 관계의 중요성에서부터 출발했다.


2차세계대전 직후 카우아이섬은 지독한 가난과 질병, 범죄로 가득찬 불행한 곳이었다. 미국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이 인간을 사회적 부적응자로 만들며 불행한 삶으로 이끈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그리하여 1955년의 카우아이섬 신생아 855명이 어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이중 특별히 더 열악한 환경에 처한 고위험군 201명을 집중 연구한 결과, 2/3는 예상대로 가장 불행한 어른으로 자란 반면 놀랍게도 1/3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부적응은 커녕 도덕적이며 유능하고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지독한 역경 속에서도 멀쩡히 자란 이들을 보며 연구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밝히고자 했던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에미 위너 교수는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건강한 힘을 회복탄력성이라 칭했고, 그 원동력을 찾아내려 애썼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연구팀이 50년에 걸쳐 발견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시련을 이겨낸 아이들에게서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었다. 바로 이들의 삶에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어른이 한명은 있었다는 것이다. 엄마든 아빠든 조부모나 친척, 때로는 마을 사람이나 선생님이든, 역경 속에서도 행복하게 자란 아이들에겐 예외없이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사람이 존재했다. 언제나 자기 편이 되어 주는 누군가에 기대어 자존감을 기르고 자기자신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충분한 사랑과 신뢰, 이것이 회복탄력성의 뿌리다.


특히 까다롭고 예민한 기질의 아이들은 가변성이 커서 양육태도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양육자가 엄격하고 냉담하면 가장 불행하게 자라고 양육자가 따뜻하고 반응적이면 누구보다 유능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밝혀지고 있다.


정신과의사 정혜신의 정적심리학 <당신이 옳다>에도 인상깊은 내용이 나온다. 부모와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중학생 아들이 있었다. 이에 충격받고 정신을 차린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를 전전한다. 하지만 아이는 병원 가기를 거부하여 엄마를 더 걱정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약도 치료도 없이 아이의 우울감이 해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와 손을 잡고 병원을 오고간 그 시간이 좋았다고, 병원 근처에서 엄마와 함께 먹었던 돈가스가 너무 맛있었다고.


아이는 자기 존재의 상태를 주목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을 찾지 못한 채 기진맥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몇번을 읽어도 이 문장은 가슴이 아리다. 그러다 걱정하는 엄마를 보며 자신이 엄마에게 유의미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했던 것이다. 작가는 이 아이에게 심리검사나 약물치료보다 엄마 그 자체가 더 강력한 치유제라고 말한다. 엄마가 아이의 존재에 집중했을 때 아이의 상처는 자연스레 치유됐다.


나는 이 얘기를 읽고 한동안 생각이 많았다. 내 편이 되어 주는 한 사람의 존재가 이토록 중요하구나. 나 역시 완전한 내 편의 유무가 사람의 정신건강을 좌우한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느낀 바 있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십대 아이들의 히스토리를 읽으며 ‘단 한 사람’의 부재가 떠오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구원자적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삶을 포기하려던 외로운 사람을 대화만으로 살린 적도 있었다. 때때로 내 역량을 넘어서까지 기를 쓰다 탈진하기도 하여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 가족에게만큼은 기댈 언덕이 돼 줄 수 있을 거 같다.


아이에게 부모란 심리적 안전지기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신뢰받은 아이는 기질적 취약점과 환경적 시련마저 이겨낼 것이다. 마음 둘 곳이 있는 아이는 편안히 자기가 가진 잠재력을 빛내며 살아갈 것이다. 내가 아이를 키우며 꼭 지키고 싶은 것을 한가지 꼽으라면 바로 이거 아닐까.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아이의 얘기에 귀기울여주는 것. 아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 고작 몇 년 키웠지만 아이가 자랄수록 이것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사춘기가 되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내 편이라 느끼는 것이 아이 인생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 알기에, 그거 하나만큼은 지켜내려 애써야겠다.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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