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선생님, 제인
어느 날 누군가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운명처럼 내 옆에 미술전공자 학교 엄마가 있었다. 마침 잘됐다, 네가 가르쳐 주면 되겠다고 제안한 뒤 배우고 싶은 사람을 모아서 미술 모임을 만들었다.
그 미술전공자의 영어 이름은 제인.
눈썰미가 좋아서 매일 같은 시간 스타벅스에 오는 외국인이 있다는 것도 알고 패션감각이 좋은 멋쟁이에 요리도 뚝딱하며 예쁘게 플레이팅까지 잘한다. 여행을 갈 때는 여행사 못지않게 30분 단위의 계획을 짜는 파워제이이며 골프는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다리가 땅에 박힌 듯이 쳐서 흔들림 없이 쭉쭉 잘 나가게 친다고 한다.
첫인상은 조용하고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미술 수업 내내 입 안 가득 음식을 넣고 웅얼거리는 귀여운 면이 있다. 큰 쌈도 한 입에 넣어 버리는 다람쥐 같은 그녀. 첼로와 와인을 좋아해 우아해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가 다 마셔버릴 것 같아 와인가게 차리기를 거부한 그녀.
이렇게 재능이 많은 제인이 재능 기부를 해준 덕분에 우리는 미술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파워제이답게 수업계획표까지 세워 다양한 재료로 젠탱글부터 오일파스텔화, 아크릴화, 레진아트 등을 배웠다. 특히 아크릴화가 매력 있었는데 물감을 섞으며 다양한 색을 만드는 것과 잘못 색칠했을 때 수정할 수 있는 점이 나와 좀 맞았다.
우리들은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이 수다를 떨다가도 각자 자기만의 작품에 열중했다.
제인과 반대로 그림에도 별로 관심 없고 요리는 대충, 음식 먹다 흘리는 건 다반사, 친구를 만나도 그날 무슨 옷을 입고 왔는지도 모르는 관찰력을 가진 나는 미술 모임을 통해 태어나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림에 임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흥미를 못 느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그림을 그릴 때 잡생각도 안 나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붓과 펜의 사용법을 배우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물론 제인의 뜻대로 내 손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제인의 한 번 터치가 나의 그림을 살려 주었고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어 기뻤다. 게다가 그림이란 것은 음악과는 다르게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니 얼마나 성취감 있는지.
내가 그린 그림을 거실 한편에 쭈욱 전시했을 때의 뿌듯함이란. 그림 그리기는 여러 모로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다. 제인의 도움으로 부모님께 고흐의 해바라기도 그려 선물해 드리고 어느 병원에서 보고 반해 찾아봤던 아노라스펜스 그림도 그려서 집에 걸어놓았다. 아노라스펜스의 작품 가격을 보면 더 뿌듯할 수밖에 없다.
때로는 한 잔 하며 그림을 그린다 해서 장난스레 취화선이라고도 불렀던 우리들의 미술 모임. 해외살이를 하면 가족과 친구들이 멀리 있기에 이웃에 살고 매일 학교서 보는 학교 엄마들과 많이 가까워지는데 특히 미술 모임은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약 일 년간의 미술모임은 나뭇가지와 구름은 어떻게 생겼는지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소실점을 찾아 원근법을 이용해 그림 속 사람이 몇 명이 있는지 세어가면서 고흐 작품 '밤의 테라스'를 재현해보기도 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아래 사진은 실제로 내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구름을 하늘에서 발견한 날 찍은 사진이다.
그날 도넛 구름을 발견한 순간 늘 보던 하늘이 특별해지는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 행복은 미술 모임을 함께 해준 자카르타 인연들과 제인 선생님 덕분에 생긴 것이기에 그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