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너는 겪는 일마다 희한하더라. 예능작가는 다 그런거냐, 니가 특이한거냐? 모아서 책을 내 봐. 드라마로 쓰던가. 지인들을 만나면 심심찮게 듣는 소리다. 하지만 내 답은 늘 같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 얘기가 궁금하겠냐. 그걸 쓰는 게 의미가 있겠나. 그냥 너네니까 이게 웃긴 거야.
십수년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겪은 일은 나만 잘 기억하면 된다고. 친구들만 재미있어 할 뿐 기록할 만한 가치는 없다고. 그게 처음 깨진 건 5년 전, SBS 에서 만든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를 준비하던 때였다.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대중음악계를 빛낸 아티스트, 제작자 외 다양한 음악 관계자 분들을 200여 분 정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자료를 책으로 만들어 인터뷰를 하다보면 의외로 영광스러운 과거도 잊은 분들이 많았다. 예전에 이러이러 하셨는데 어떠셨어요? 라고 물으면 - 어머 내가 그랬어? 나 좀 대단했네? 도대체가 늙어서 그런가 기억이 하나도 안나. 하는 답변이 쉽게 돌아왔다. 역사에 남겨야 할 대단한 업적을 가진 분들인데 그런 게 잊혀질 수 있나 하며 놀라기도 했고, 나의 기억 역시 더 늦기 전에 흩어져있는 조각을 찾아서 잘 복원해서 기록해 두어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현생에서 방송에 필요한 글을 쓰는 동안 내 이야기를 쓸 엄두는 내지 못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니고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언제든 쓰면 되지 하는 확신도 있었다. 작은 걸 하나 떠올려도 입었던 옷, 향기, 시간, 대화, 분위기까지 꽤 구체적으로 연상하는 건 몇 안 되는 내 장기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데 최근 과거의 자료를 뒤적이다 큰 충격을 받았다. 분명 내 글씨인데 왜 썼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때 알았다. 기록은 언제 해도 되는, 미뤄도 되는 일이 아니다. 아카이브가 중요한 일을 기록해 두는 거라면 그걸 깨닫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다. 위대하던 소소하건, 원하든 원치 않든 기억은 휘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사이드 아웃의 빙봉처럼 소중했던 기억도 현실에서 새로운 일들 속에 볶이며 살다보면 흐릿해져서 소멸된다. 나의 기억도 이미 많이 사라졌겠지. 그래서 더 미루지 않고 기록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잊지 전에 아직 기억속에 남아있는 - 꽤나 발칙하게 버텨온 21년간의 방송작가 생존기를. 먼훗날 오래된 영화 티켓 처럼 엷어지고 나서 아쉬워 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