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여행을 떠났다. 보통은 취직 준비를 하다가 직장에 들어가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때가 되면 아이를 낳고 그렇게 가족을 부양하다 늙어 죽는 인생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편적인 삶이다. 그런데 난 이런 삶이 재미없어 보였다. 의미도 없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보려고 했다.
당시 세계여행은 마치 유행처럼 한반도의 젊은이들을 뒤덮고 있었다. 나도 그 유행 속에 휩쓸려 여행을 떠난 것이다. 당시에는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만 생각했지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상에 눈이 멀어 현실을 보지 못했던 것도 어느 정도 포함된 이야기다. 여행을 떠나기 전 사촌누나 결혼식에서 삼촌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다녀와서 뭐 할 건데?” 당시에는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녀와서의 일을 걱정하는 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죽은 후의 일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사실은 생각하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속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만 상상했지 다녀와서의 일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뭘 해야 될지 몰라서 떠났던 것도 있고, 취업 활동하는 게 싫어서 떠났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 스스로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남이 정해 준 대로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떠나야만 했고, 그렇게 떠났다. 1년 6개월을 여행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이 자신보다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고 실패보다는 성공한 삶을 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기에 돈을 들여 정성을 들여 사랑을 담아 애지중지 키운다. 하지만 현실은 모든 사람이 다 잘 살지도 성공하지도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하고 좌절을 하고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종국에는 하지 말아야 할 선택까지 한다.
여행을 다녀오면 다 잘 될 줄 알았다. 세상이 나를 알아 봐 줄 거라 생각했고 세상의 중심이 되어 세상을 바꿔 놓을 인재로 성장하고 인정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난 그저 1년 6개월 동안 열심히 놀다 온 백수에 불과했고,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난 후 더 방황을 하고 말았다.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으면서 그저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만 하는 나태한 마음은 내가 가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단점이었다.
가끔 세계여행을 다녀와서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여행 후에는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다. 실제로 여행 중에 어떤 업체와 한 인터뷰가 네이버 메인에 걸려 신기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여행을 다녀온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거나 내 위치가 바뀌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을 다녀온 후 더 깊이 방황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분야였고 나 혼자 좋자고 떠났던 여행과는 확실히 달랐기 때문에 고민이 깊어만 갔다. 결국 이것저것 시도해봤지만 거듭 된 실패 앞에 나 자신은 점점 초라해져만 갔다. 더 이상 세계를 여행하며 도전적이고 열정적이었던 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당장 먹고는 살아야 하니 일단 무슨 일이든 시작해야 했다. 서른이나 돼서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순 없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일이 바로 은행 경비원이다. 보통은 청원경찰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다. 청원경찰은 청원경찰법을 따르지만 은행 경비원은 경비업법을 따르는 엄연히 다른 직종이다. 과거 IMF 이전에는 은행 경비원이 아닌 청원경찰이 맞았다. 그때는 지금처럼 하청업체를 둔 파견직이 아닌 은행이 직접 고용을 한 은행 소속 청원경찰이었다. 하지만 IMF 이후 비정규직이 합법화되면서부터 은행은 책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청원 경찰직을 은행 경비원으로 바꿔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저 지금 나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퇴근시간이 빠르고 근무환경도 좋고 월급도 최저시급보다 많이 받고 퇴직금도 지급이 되는 일이라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훨씬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잠깐만 하고 그만둬야 하는 일이지 오랫동안 지속하기는 힘든 일이라는 것을 2년간 일하며 느꼈다. 물론 급여가 작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고용불안과 그에 따른 사회적 시선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아직 이 곳에는 귀천이 너무나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정규직인 은행원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과의 격차, 차별 그리고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편견 같은 것들이 느껴지면서 “아 내가 비정규직이구나.” 하는 사실이 몸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 경비원을 직업으로 삼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이렇게 까지 오래 일을 할 줄은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대로 이것이 나의 완전한 직업이 되어 버릴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사실 그러기에는 너무도 많은 리스크들이 있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안정적이지 않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불안을 느낀다. 이대로 괜찮은가? 일을 하고 있지만 뭔가를 더 해야만 할 거 같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그런 거 말고 가장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니 독서와 글쓰기였다. 2014년부터 블로그를 했고, 책은 여행을 다녀오고 난 후로 꾸준히 읽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글을 조금 더 제대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은 글을 쓰는 나를 두고 “대단하다 멋지다 나는 글 쓰는 거 어려워서 못하겠다.” 말하지만 나에겐 사실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잘하든 못하든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내가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습이며 나를 포장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벗어낸 가장 부끄러운 이야기들을 풀어내려 한다. 나의 능력 없음을, 나의 모자람을, 나의 부족함을, 나 스스로 세상에 드러내고자 한다. 그럼에도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른 비정규직에 몸 담고 있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가 닿아 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나아가 이 사회가 조금은 더 나은 사회가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펜을 들고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고 한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될 때 이 곳은 더욱 살만한 이야기들로 가득 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한자씩 써내려 간다. 모두의 이야기가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