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마음

by 김희진

김희진(구 김정희)


모스크바 선교지에서 만난 인연이

한국의 식탁으로 이어지고

다시 공항의 이별로 남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과

시간 속에 스며든 기억을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한다.



젊은 날, 마흔의 나이에

모스크바 선교지에서 만난 한 아이가 있었다.

한국말을 하는 고려인들도 있었지만

열여섯 살이던 레나는

서툰 한국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길을 잘 모르는 우리를 위해

앞장서서 안내를 해주고

무슨 일이 있으면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그 한마디가

낯선 땅에서의 거리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곳에는

레나처럼 눈이 맑고 예쁜

러시아 소년, 소녀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은 우리를 좋아했고

우리 또한 그 아이들을 아꼈다.

헤어질 때면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간 옷과

작은 소지품들을 나누어 주었고

그들은 스카프와 액세서리를 건네주며

자신들의 마음을 전했다.

말보다 먼저 포옹이 있었고

때로는 뽀뽀도 서슴지 않았다.

그 따뜻한 온기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레나였다.

그리고 그 인연은

한국의 우리 집까지 이어졌다.

지난 8월, 찌는 듯한 무더위가 이어지던 어느 주일 오후.

연합 찬양 연습을 마치고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뒤에야 집에 도착했다.

계단에 들어서는 순간

압력솥 신호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딸랑딸랑—칙칙—딸랑딸랑—치익칙.

문을 여는 순간

고소한 닭고기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점심에 교회에서 간단히 식사를 했던 남편이

시장기를 이기지 못하고

닭요리를 시작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밥도 잘 찾아 먹지 않던 사람이

싱크대 앞에서 얼린 닭을 녹이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작은 방에 있던 레나가

몇 번이나 들락날락하며 물었다고 한다.

“아빠, 맛있는 냄새… 이거 뭐예요?”

그 아이는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아들 여자친구였다.

방학 동안 한국에 와서

우리 집에 머물고 있던 아이였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했을

그 아이를 생각하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레나야, 아빠랑 닭고기 먹자.”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닭고기를 뜯기 시작했다.

“여보, 빨리 와서 같이 먹자.”

그 말은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그 모습만으로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레나는 고기와 빵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서 왔다.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 했지만

나는 주로 김치찌개로 식사를 챙겼다.

얼마나 고기가 먹고 싶었을까.

뒤늦게 쇠고기를 사다가 국을 끓였을 때에도

그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맛있는 냄새 많이 나요.”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도,

또 미안하게도 했다.

어느새 레나는

손님이 아니라 가족이 되었고

가끔은 서툰 말투로

엉뚱한 말이나 장난을 하며

우리를 웃게 했다.

“엄마, 엄마…”

그러다 함께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그 말은

서로를 다독이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들에게

러시아처럼 크고 넓은 나라에 가서

넓은 세상을 보며 살기를 권했다.

추운 나라는 싫다며

가지 않겠다던 아들이

어느 날

조용히 말했다.

“엄마, 가볼게요.”

넉넉한 여비도 챙겨주지 못한 채

아들을 보내던 그 시절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마음은 자꾸만 무너져 내렸다.

그때 아들이 말했다.

“엄마, 공항에선

언제나 마음이 깜깜해요.”

그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쉐레메찌예보 공항을

수없이 오고 가며

만남과 이별을

얼마나 많이 거듭했던지

웃으며 돌아서도

눈물은 늘 뒤따랐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은

아마 그런 곳에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일 것이다.

어제 만났어도

오늘 또 보고 싶고

헤어질 날이 가까워지면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던 시간.

왜 그리 눈물이 났는지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던

정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압력솥 소리와

닭고기 냄새가 떠오르면

모스크바의 거리와

레나의 웃음,

쉐레메찌예보 공항의 긴 통로와

아들의 뒷모습까지

한꺼번에

내 마음으로 걸어 들어온다.

깜깜했던 마음 속에도

결국은

사람의 온기가

빛처럼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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