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뿌리를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그곳은 우리 큰며느리와 둘째 며느리의 고향이다.
한국에서의 정착이 쉽지 않았던 며느리는
어린 딸을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한국으로 들어와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이 더 좋다 말하면서도
그 말 속에는 늘
아이를 두고 온 마음이 따라온다.
일 년에 한 번,
그 먼 길을 오가지만
그리움은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서
손녀 밀리에나를 다시 만났다.
네 살 때 헤어졌던 아이는
이제 중학생이 되어 있었다.
한국말만 하는 할머니와
러시아어를 쓰는 손녀는
말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핏줄이라는 것은
말보다 먼저 손을 잡는다.
수영장에서 마주 보고 웃고
흘랩 빵을 함께 뜯어 먹으며
하루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먼저 말을 건넨다.
사돈 스베따와도
낯섦 없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
서울과 타슈켄트 사이에는
네 시간의 시차가 있다.
그러나 그 거리보다 더 먼 것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이번 타슈켄트 방문은
아들의 모스크바 사업체에 머물다가
비자 연장 문제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그 길에서
큰며느리의 친척들과 만났고
나는 한 가족의 뿌리를 만났다.
서툰 한국말로도
마음이 통하는
고려인 김창수 어르신과
그 가족, 그리고 딸 갈랴 이모.
그분들의 따뜻함은
낯선 땅에서 만난
오래된 고향 같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어느 날, 기차에 태워졌다.”
일제강점기,
살기 위해 연해주와 소련 땅으로 떠났던 우리 민족.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죽음을 견디며 도착한 그곳에서도
또다시 떠나야 했다.
짐을 챙길 틈도 없이
러시아 군경에 의해
차가운 기차에 실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야 했던 시간.
기차는 멈추지 않았고
겨울은 끝이 없었다.
아이들은 가운데로 모였고
젊은이들은
자신의 체온으로
그 작은 몸들을 감싸 안았다.
노약자들은
그 안에서 생을 놓았다.
그러나
작게 떨던 아이의 숨 하나가
끝내 남았다.
그 숨이
오늘의 후손을 살렸다.
도착한 곳은
진흙과 황무지, 검은 땅.
지금의 타슈켄트였다.
그들은
맨손으로 땅을 팠다.
수로를 만들고
물을 끌어들이고
지켜온 볍씨를 뿌려
벼를 키웠다.
그리고
학교를 세웠다.
굶주림 속에서도
말과 글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김창수 할아버지도
그 교단에 서 계셨다고 했다.
삶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던 사람.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자
다음 세대를 향한 약속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분들의 정은
유난히 깊다.
굶주림을 겪은 사람들의 인사는
늘 같다.
“많이 드세요.”
무엇을 사드릴까
어떻게 더 먹일까
끝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손길.
나는 그곳에서
가슴이 저려오는
한국의 정을 보았다.
그 따뜻했던 자리에서 만났던
김창수 할아버지는
2025년,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 소식을 들은 뒤로
나는 아직
타슈켄트에 가지 못하고 있다.
다시 그 땅을 밟는 일이
어쩐지 쉽지 않다.
2026년 1월,
아들과 며느리를 통해
갈랴 이모에게서 선물을 받았다
이모가 좋아하는 라면과
그리고
정성껏 버무린
깻잎 장아찌도 함께 보냈다.
그분이 좋아하시던
한국의 맛이
조금이나마 닿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
기다림은
이제 익숙한 감정이 되었지만
문득
그 겨울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수영장에서 마주 보며 웃던 순간,
흘랩 빵을 나누던 손,
“많이 드세요” 하던 따뜻한 목소리.
소식은 없지만
사람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 이어진 마음은
시간을 건너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나는 믿는다.
그 기차에서 이어온 숨처럼
그 인연 또한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안다.
우리 큰 며느리는
고려인 4세라는 것을.
밥을 유난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
아이들이 밥을 먹지 않으면
밤중이라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여야 비로소 잠을 재운다.
그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제는 안다.
굶주림을 건너온 시간,
기차에서 이어진 숨,
그 모든 기억이
한 그릇의 밥이 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