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에서 출발한 기차는
바다 아래를 지나 런던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로스타였다.
비행기보다 더 신기했던 여행,
하늘이 아닌 바다 속을 지나
다른 나라로 간다는 사실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공항보다 더 까다로운 절차를 밟고
여권을 확인하고 짐을 검사받고
긴 기다림 끝에 올라탄 기차 안은
의외로 고요했다.
출발의 흔들림도 없이
어느 순간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유리관 속 수족관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세상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흔들림도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달리고 있는지
날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속도 속에서
시간마저 가볍게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는 바다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깊은 곳,
빛도 닿지 않는 길을
이렇게 조용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믿기지 않았다.
그 긴 어둠을 지나
다시 빛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곳이
세인트 판크라스역이었다.
붉은 벽돌과 유리 지붕,
성당처럼 높은 천장 아래 펼쳐진 공간은
환상처럼 다가왔다.
천장 아래 걸린 커다란 시계,
그리고 서로를 끌어안은 연인의 동상.
떠남과 만남의 순간이
그대로 멈춰 서 있는 듯했다.
한쪽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인의 동상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역이 사라질 뻔했던 시간 속에서
끝까지 지켜낸 사람.
나는 그 앞에 서서
잠시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지켜낸 시간 덕분이라는 것을.
존 베쳄(John Betjeman) 시인 동상 곁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역을 나와
런던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오래된 건물들이
시간을 품은 채 서 있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낯 익은 얼굴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상점의 진열장에도,
기념품 가게에도,
어느 벽면의 사진 속에서도
한 사람의 얼굴이 반복되어 나타났다.
엘리자베스 여왕.
이미 한 시대를 지나
역사가 된 이름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이 도시 곳곳에 살아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 도시가 지닌 시간을 느꼈다.
유로스타를 타고
바다 아래를 지나 도착한 여행이
이제는
한 나라의 시간과
한 사람의 삶을 마주하는 순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행은
그저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날 나는
보이지 않는 길을 지나
지켜진 시간 속에 도착해
사람이 남긴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런던은
건물보다도
시간이 더 깊이 살아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 또한
소중한 기억으로 머물고
중심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