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진
추석이 다가오면 외할머니 잠들어 계신 산소가 더욱 생각난다.
해바라기처럼 환한 웃음으로 외손자녀들의 뒷바라지를 낙으로 삼으시던 분.
산비탈을 일궈 만든 밭고랑에서 배추를 가꾸며 흙을 벗 삼아 사셨다.
버석버석 갈라진 할머니의 손은 마치 가을 낙엽 같았다.
배고픈 아이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시며
매운 연기를 쐬어 가며 차려주시던 저녁상.
상 위에 올려진 짠지와 콩고물 묻힌 밥은 왜 그리도 고소했던지
콩밭만 지나도 그 고소함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딸만 셋을 두셨던 외할머니는 둘째 사위인 내 아버지를 데릴사위로 삼아 함께 사셨다.
인품 좋고 유머가 풍부한 분이었지만 일정한 직업 없이 만주로, 상하이로 외지 출입이 잦았고 도박까지 즐겼다.
그 바람에 많지 않던 가산마저 탕진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고생하는 딸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점촌면 흥덕 싸리울타리 좁은 집에서 홀로 지내셨다.
아버지는 중년에 접어들면서 속병까지 깊어졌다.
어린 자식들과 살길을 찾아 문경군 영순면 어느 산골 외딴집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는 작은 농토와 유실수 몇 그루가 있었고
산골 중턱의 해장사 절이 유일한 이웃이었다.
능선 마루에 쌓아 올린 탑 곁에서
기우뚱한 초가집을 내려다보던 스님을
아버지는 신선 같다고 부러워하시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은 점점 깊어졌다.
밤마다 심한 통증으로 방안을 헤매시고
날이 밝으면 아픈 몸을 이끌고 청솔가지를 꺾어 와
매서운 겨울 추위를 막아야 했다.
솔가지 타는 매운 연기에
어머니 눈에는 눈물이 흘러
눈가가 붉게 짓무르곤 했다.
그 눈이 얼마나 아프고 불편했을까.
어리고 철없던 우리는 그 시절을 다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주듯 살아온 부모의 시대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