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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글쓰기의 미래

by 신비


글쓰기 숙제


중학교 시절 쓴 일기장 몇 권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손발이 오그라들까 봐 한 번도 펴보지 못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버리지 못하겠다. 대단한 문학소년이어서 열심히 일기를 쓴 것은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일기를 일주일에 몇 번은 꼭 써보라고 숙제를 내주셨다. 일기 쓰기의 장점을 설명해 주셨는데, 정확히 뭐라 하셨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모범생인 나에겐 그저 숙제였다.


나는 나름 성실하게 일기를 써나갔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일기장을 쓱 넘기며 도장을 찍어주셨다. 내용은 안 본다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아마 안 보는 듯 훑어보셨을 것이다. 나도 그걸 알고 일기를 썼다.


지나고 보니 선생님의 의도는 나름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나는 매일매일을 돌아보며 그날 중요한 감정을 글로 정리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고등학교 작문 시간에 선생님의 칭찬도 자주 받았다. 대학 시절에도 종종 글을 쓸 일이 있었는데, 나에게 글쓰기는 어렵지 않고 친근한 일이 되어 있었다.


말하기 위해 쓴 글


청년 시절 나의 글쓰기는 말하기 위해 쓰는 글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던 나는 대중 앞에서 말할 기회가 많았는데, 저학년 시절 내용 없는 발언자를 보면서 무책임한 활동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발언 기회가 오면 준비를 많이 했다.


말하기 위해 쓰는 글은 듣는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 이야기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쉬워야 한다. 구어체 형식으로 친근하게 써야 한다. 이런 습관은 '쉽게 쓰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나만의 기준을 만들어준 것 같다.

일이 된 글쓰기


나이가 들었다. 나는 주로 시민사회, 정당에서 일했다. 정치 활동은 말과 글로 행해진다. 내부적으로는 사업계획서로 입장을 통일하고, 밖으로는 성명서나 기자회견문, 보도자료를 통해서 대중을 설득한다.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글쓰기가 나의 주요한 업무가 되었다.


시간을 다투는 만큼 글쓰기 속도도 중요하다. 늘 정확한 말, 날카로운 말을 고민한다. 점점 글쓰기가 기술이 되어갔다. 뉴스를 공부하는 것을 넘어 내용과 철학이 있는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공부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준 시절이었다.


글쓰기의 미래


요즘 글을 쓸 때면 AI의 도움을 받는다. 맞춤법부터 사실관계 점검, 문체 다듬기는 AI의 몫이다. 아니, 처음부터 몇 가지 정보로 초안을 부탁할 수도 있다. 전문적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필요도 없다. AI한테 물어보면 어지간한 건 전문가 흉내도 낼 수 있다. AI의 발전 속도를 보면 글 쓰는 일은 조만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AI에게 얼마나 적절한 입력값을 잘 제공하느냐가 글쓰기의 실력이 되는 걸까?


몸이 안 좋아지고 나서 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글을 쓴다. 나의 글쓰기는 다시 중학교 담임선생님이 내준 일기 숙제로 돌아갔다. 반공개 일기장처럼 머릿속의 생각을 글로 정리한다. 약간의 긴장감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듯이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면 마음도 단단해진다. 이런 것은 AI가 대신해주지 못하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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