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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 이야기_1

_그들은 왜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렀나?

by 신비

노란봉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제 6개월 준비 기간을 거쳐 법이 시행될 것이다.


노란봉투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에 교섭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임금과 근로조건뿐 아니라 회사 경영 사항에도 노동조합이 쟁의할 수 있게 된다. 셋째, 파업하는 노동자에 대한 무분별한 손해배상이 제한된다.


기업과 보수 언론은 벌써 호들갑이다.

마치 노란봉투법 때문에 당장 수많은 파업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언론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 역사적 배경


그렇다면 노란봉투법은 왜 만들어졌을까?


이야기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거슬러 간다.


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80년대 한국경제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낮은 임금과 비인간적 대우 속에서 일했다. 노동자 대투쟁은 그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다. 그해에만 수천 건의 파업이 있었고, 노동조합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89년 노동조합 조직률은 18.6%로 지금의 두 배에 달했을 정도다.

80년대 말~ 90년대 중반까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투쟁으로 노동자들의 삶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그림1.png 노조조직률 변화(통계청)


더 이상 낮은 임금과 억압적 작업환경을 고집할 수 없었던 기업은 이윤을 지속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더 이상 정규직을 뽑지 않고 사업의 일부를 외주화 하거나 하청 업체에 맡겼다. 합법적 노동조합을 무작정 탄압하기 힘들어졌기에 노동조합의 파업투쟁에 대해서는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87년 이후 팽팽하던 노사관계는 97년 IMF 사태를 겪으며 다시 자본 우위로 바뀐다. 정리해고제가 도입되었고, 경제가 어렵다는 논리 속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는 외면받았다. 구조조정을 요구받던 자본은 노동자에게 고통을 떠넘겼다.


노동조합은 투쟁했고, 파업투쟁에 대한 기업의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도 이어졌다.


IMF 이후 기업의 외주화도 노골적으로 진행된다. 기업은 형식적인 하청업체를 만들었다. 불법 하도급, 불법 파견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정규직은 줄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급속하게 늘어났다.


하지만 하청업체, 외주업체들에도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원청의 지배를 받는 이들의 임금인상 투쟁은 원청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지속되었다.


노사분규 때마다 벌어지는 기업의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과 노동자의 죽음은 그때마다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 사건들..


기업의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은 끈질기게 노동자들을 괴롭혔다.

그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뉴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사건들만 정리해 봤다.


_배달호 열사 (두산중공업)

공기업이었던 한국중공업은 IMF 이후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두산그룹은 기업명을 두산중공업으로 바꾸고 2001년부터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노조는 이에 맞서 47일간의 파업투쟁을 진행했다.

노동조합 간부를 맡고 있던 배달호 열사는 이 투쟁으로 두 달여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후에도 사측은 노동자들에게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노조간부들의 손배가압류 금액은 65억 원이었다. 압류된 배달호 열사의 월급통장에는 매달 2만 5천 원의 급여가 찍혔다고 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2003년 1월 9일 노조탄압에 항거하며 창원공장에서 분신하였다.


_김주익 열사 (한진중공업)

2002년 한진중공업은 수백억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650여 명의 정리해고와 임금동결을 강요했다. 이를 반대하며 투쟁한 노조 간부 20여 명에게 7억여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월급에 집까지 압류당한 노조 간부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회사 측의 불성실한 교섭과 손해배상 협박이 지속되었다. 이에 김주익 열사는 사태해결을 위해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진행한다.

하지만 고공농성 129일 차인 2003년 6월 10일, 그는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크레인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2010-12-29 14.02.37.jpg 한진중공업 투쟁사진

_쌍용자동차 사건

IMF 이후 쌍용차는 대우, 상하이(중국)에 매각되었지만 회사의 위기는 지속되었다. 2009년 1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자동차는 회사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기며 2,646명의 인력감축안을 발표한다.

이에 노동자들이 반발하며 공장점거 파업이 시작된다. 2009년 5월 22일부터 76일간의 파업은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일단락되었다. 파업 이후 2,600여 명의 노동자가 직장을 잃었고 96명이 연행되었다.

이후에도 쌍용자동차는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들을 대상으로 수백억 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했다. 해고와 손해배상에 대한 지속적인 압박, 폭력진압의 후유증 등으로 쌍용자동차 조합원들과 그 가족 30여 명이 자살하는 등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_CJ대한통운의 택배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코로나 시기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가 속출하며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2021년 택배사들은 택배노조, 정치권과 함께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협약을 맺는다. 하지만 CJ대한통운이 부속계약서를 통해 합의를 무력화하려 하자 노동조합은 파업에 돌입한다. 파업 47일 차에도 해결의 실마리가 없자 노동조합은 본사 점거농성을 했고, 18일간의 점거농성 끝에 합의를 이끌어낸다. 하지만 회사는 합의 이후 점거농성을 이유로 조합원 88명에 대해 20억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한다.


_대우조선(한화오션) 하청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대우조선의 하청 노동자들은 고질적인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며 2022년 51일간의 도크 점거 농성을 한다.

이 과정에서 하청노조 부지회장이 1m 크기의 철제 구조물에 들어가 농성을 하기도 했다. 51일간의 점거농성은 2022년 7월 임금 협상이 타결되며 종료되었지만, 회사는 선박 진수가 늦어져 손해가 발생했다며 하청노동조합 간부 5인에게 47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노란봉투법이라는 이름


이야기는 IMF 구조조정에 맞선 정규직 노동자에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로 이어진다.

30년 전 시작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이야기다.


파업투쟁 때마다 기업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이어지지만, 실제로 끝까지 소송이 진행되거나 손해배상을 받아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회사는 막대한 손해배상을 일단 청구하고 본다. 회사의 목표는 소송을 통해 노동조합 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법원이 거액의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이에 시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노란색 봉투에 담아 전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더 이상 죽음을 방치할 수 없다는 시민들의 공감이 확산되며, 이 법은 "노란봉투법"이 되었다.


노란봉투법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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