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내면과의 소통으로서의 기도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서 굿판이 열린 적이 있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 굿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손바닥을 비비며 '비나이다'를 반복하던 무당과 엄마의 모습, 나를 향한 무당의 호통, 누군가 쥐어준 쌀을 흩뿌리던 나의 모습까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스무여 채 남짓한 작은 시골 마을에 살았는데, 동네에서 가끔 굿판이 열리곤 했다. 80년대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봤을 만한 풍경이다. 교회도 절도 다니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기도를 배웠다.
우리 외갓집은 유독 토속신앙과 인연이 깊었다. 이모님은 신내림을 받으셨고, 외삼촌은 작은 법당을 차리셨다. 친지들은 새해나 명절이 되면 외삼촌의 법당을 찾아 절을 하고 소원을 빌었다. 나도 그 자리에 끼어 무언가를 바라며 기도를 했다.
어린 시절에는 제사도 잦았다. 온 친척들이 큰집에 모여서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무언가를 기원했다. 초등학교 시절, 제사는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먹을거리도 풍성했고, 친척들이 쥐어주는 용돈도 쏠쏠했다. 장손인 나는 제삿날이면 대접을 받았다. 손자들을 대표해서 술잔을 놓고, 마음속으로 무언가가 잘 되기를 바라며 사뭇 진지하게 절을 올리곤 했다.
성인이 되어가면서 나는 이런 행위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대학 시절 유물론을 접하고부터 나는 이런 행위가 낡은 것, 불필요한 겉치레라고 여겼다. 감정에 이론까지 더해졌으니 싫은 기색이 얼마나 역력했을까. 한두 번 툴툴거리는 모습에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법당에 가자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집안의 제사도 차츰 줄어들었다. 1년에 한 번 모이는 것으로 축소되더니 명절날 제사도 사라졌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제사를 맡을 사람이 애매해진 탓도 있었지만, 장손인 내가 제사를 이어받는 것을 거부한 이유도 컸다.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이 많지만, 그 시절엔 제법 시대를 앞선 결정이었다.
종교 생활이 없던 나에게, 무언가를 위해 기도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청년 시절 나는 나보다 세상일에 집중했다. 세상은 사람이 바꾸는 것이지 기도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든 논리가 있고 현실적인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또 무언가를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도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심리학자 칼 융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의 통합을 통한 자기 이해와 성찰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직접적인 종교적 경험이 단순한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계기라고 해석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도는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 성찰과 통찰을 얻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청년 시절 나는 기도를 단순히 종교적 행위로만 이해했다. 나이가 들고, 몸과 마음의 변화를 겪으며 삶의 복잡함을 깨닫게 되었다. 마음의 평온이나 자기 위로를 위한 내면의 대화도 필요해졌다. 최근에 몸이 아프게 되니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할 마음속 대화가 더 절실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도에 서툰 사람, 내면과의 소통에 서툰 사람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저울로는 잴 수 없는 내 바람 조금과 구름보다 가벼운 내 의견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그래서 불안한 내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그것이 '기도의 힘'이 아닐까? 나는 이제라도 나와의 대화를 위해 노력해 본다.
그리고 나만의 원칙도 정해 본다. 과하지 않게. 그리고 나보다는 세상을 위한 기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