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을 그만두고,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선배 : 오랜만이다 희종아. 나 기웅이형인데, 너 회사 어디라고 했지?'
나 : 형 오랜만이에요, 저 한국콘텐츠진흥원 다녀요
선배 : 잘됐다, 나 거기에 지원사업 넣었는데 신청서 한 번 봐줄 수 있어?
나 : 네, 그럼요. 언제든 시간 될 때 연락 주세요
선배 : 그럼 오늘 되냐?
나 : 네? (뭐지 이 사람?)
(별로 친하지 않은) 대학교 동아리 선배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그때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받지 말걸 생각도 가끔 한다. 아니 아예 그 동아리를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았으려나? 이 연락으로 인해 부모님께 후두려 처맞을 뻔한 일이 일어났다. 공기업 퇴사.
2년 전 나는 공기업을 다니고 있었다. 원래 하고 싶었던 '다큐멘터리 감독'은 포기했지만, 콘텐츠 산업 생태계 전반이 달라지지 않고는 다큐멘터리고 뭐고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다는 생각에, 이 나라의 판을 바꿔보겠다는 풍운의 꿈을 꾸며? 한국콘텐츠진흥원이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잠깐 말하자면 한국콘텐츠진흥원이라는 회사는 좋은 회사다. 평생직장이라서가 아니라, 일개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콘텐츠 산업의 발전이라는 공공의 목표로, 다양한 분야의, 더 다양한 사업을, 내가 기획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할 수 있다. 좋은 회사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일에 재미도 붙이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회사에서 이런저런 TF팀이다 뭐다 하며 뺑뺑이도 많이 돌았다.
일 하면서 느끼는 게 하나 있었다면, 콘텐츠를 하는 사람들이 아이디어는 좋은데 그 좋은 아이디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약간 아티스트와 같아서 머리 속에 있는 창의적인 생각들을, 논리적으로 잘 풀어서 특히 '글'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이제 와서 얘기하지만, 공문부터 시작해서, 각종 보고서나 제출서류들을 대신 많이 써줬다. 자기들 잘 하는 일에 집중하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이유로 발전 가능성 있는 좋은 아이템들은 죽어 나가고, 보고서만 그럴듯하게 잘 쓰는 기업들이 정부의 눈먼 돈을 챙겨간다고 생각한다.)
아마 오랜만에 연락을 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 선배도 그럴 것 같았다. 스타트업이니, 분명 내가 봐온 기업들이랑 비슷한 상황일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가서 보니 예상이 맞았다. 사업계획서가 아니라 거의 일기장에 가까웠는데, 머리 속에 뒤죽박죽 엉켜있는 창업자의 생각이, 정부사업 지원서라는 양식에 들어갈 자리를 못 잡고 빙빙 돌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아마 틀림없이 거의 100%로 이 지원서는 심사위원들에게 읽히지 않을 것이다.
그때 처음 본 게 '공유주방'이라는 아이템이었다. 선배 말로는 미국에서 먼저 시작해서 지금 많이 커나가고 있는 아이템이고, 한국에서는 본인의 회사가 처음 시도하는 거라고 했다. 그 당시 스타트업 관련 부서에 있던 나로서도 굉장히 생소했다. 일단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주방을 공유한다고? 친목 도모하자는 말인가? 그래서 뭘 할 수 있는데? 이게 사업이 될 수 있나? 이것저것 물어봐가면서 멘토링을 해줬다. 이렇게 쓰면 안 되고, 이건 저쪽에 쓰셔야 되고, 표나 사진을 이쯤에 넣어주시면 좋고, 예산은 이렇게 편성하시고 등등...
얼마 안 있어 선배한테 연락이 왔는데, 결과적으로는 탈락했다고 했다. 1차 서류평가는 통과했는데, 2차 면접에서, 예상되었던 바이지만, 지원사업의 목적과 해당 사업의 내용이 맞지 않았던 점, 예산 사용의 적절성 문제와 관련하여 심사위원들의 질문이 많았다고 했다. 아쉽다며 나에게 한 마디를 했다.
선배 : 너 우리 회사 오지 않을래?
나 : 네?
선배 :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나 : 아 네, 형 고맙습니다. 알겠어요,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응 싫어.)
생각해 본다고 얘기했지만 당연히 NO였다. 이 사람이 미쳤나?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같이 일을 하자고 하는 거지? F&B산업에 관심도 없고, 공유주방이라는 아이템도 잘 모르겠고, 그리고 대표라는 그 형도 솔직히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내 판단이 옳다는 듯 당연히 주변에서도 모두 반대를 해줬다. 직장동료, 선후배, 말할 것도 없이 가족, 그리고 대표를 잘 아는 대학교 동아리 사람들까지. 그리고 몇 개월 후,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뒤로한 채, 뭔가에 홀린 듯이 나는 사직서를 써버리고 말았다.
2017년 1월, 나는 심플프로젝트컴퍼니에 입사를 했고, 그때부터 '공유주방'은 내 직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