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우선적으로 해주지만 내가 좋아함에도 해주지 않는 것이 딱 두 가지 있다. 바로 곰탕과 동치미.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 지나가는 말로 은근슬쩍 곰탕과 동치미를 입에 올리면 엄마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 엄만 곰탕 안 먹어” 등의 이유를 대며 철벽 방어막을 치신다. 엄마가 쌓아놓은 그 견고한 성을 함락하지 못해 집에서 엄마손 표 곰탕과 동치미 먹기는 포기한 지 오래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친한 언니들이 산다. 일 때문에 만난, 출판사 편집자와 마케터로 일하는 이 언니들 집에 자주 가서 놀다 오곤 하는데 자주 감에도 늘 언니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 손에 뭔가를 쥐여 준다. 친정집에 왔다 가는 딸내미 손에 뭔가를 잔뜩 들려 보내는 엄마처럼. 빈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언니들이 쥐여 준 비닐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그것들을 식탁 위에 펼쳐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다란 병에 담긴 동치미 국물, 비닐 팩에 따로 넣어준 동치미 무, 꽁꽁 얼린 곰탕 봉지, 500그램짜리 임진강 쌀 한 봉지, 써보니 좋다며 챙겨준 대나무 수세미. “엄마 아빠 없어도 굶어죽진 않겠네.” 부엌을 지나가던 엄마가 한마디 던지고는 총총총 안방으로 사라진다. 그러게, 정말 혼자 살아도 굶어죽진 않겠네. 우리 엄마가 안 해주는 게 딱 이 곰탕이랑 동치민데, 어떻게 알고 이것들이 나한테 온 걸까. 나에게 부족한 걸 채워주는 이 언니들은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오게 된 걸까.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식탁 위에 놓인 봉지, 봉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려니 코끝이 시큰시큰해졌다. 동치미 무가 우리 희주 참 예쁘네, 꽁꽁 얼어 있는 곰탕이 나는 희주가 참 좋아, 500그램짜리 임진강 쌀이 우리 희주 잘했네 잘했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언니들의 마음이 식탁 위에서 부스럭부스럭, 술렁술렁거렸다.
이렇게 늘 받기만 해서 어쩌나. 나는 안부 연락도 잘 안 하고, 잘 챙기지도 못하고, 그저 내 몸 하나 건사하기 바빠 종종거릴 뿐인데. 이렇게 받은 마음들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나. 몸 둘 바를 몰라 지나가는 말로 은근슬쩍 언니들에게 “이렇게 늘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어떻게 보은을 해야 할지요” 말하면 언니들은 “우리한테 잘할 생각 말고 나중에 후배들 만나면 니 후배들한테나 잘해”라고 철벽 방어막을 친다.
한 살, 두 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이가 쌓여가면서 어떤 어른이 돼야 할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생각한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게 될까?
가장 큰 지상 과제는 꼰대가 되지 않는 것. 세상에 이런저런 모습의 꼰대가 숨어 있고, ‘이러저러한 사람이 꼰대다’라는 꼰대 감별 지침서 같은 것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요즘 내가 정의내린 꼰대는 ‘너는 틀렸어, 당신은 잘못하고 있어’ 단정 지은 채 상대와 마주앉는 사람이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침대 위에 상대방을 눕히고 그 침대에 맞춰 발이나 손, 머리를 댕강댕강 자르는 사람, 우선 상대의 치수를 재고 거기에 맞춰 맞춤 침대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이 겪고 알아온 사람들의 치수를 바탕으로 뚝딱뚝딱 침대를 만들어놓고 그 위에 모든 사람을 눕히는 사람이 꼰대이리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꼰대는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되는 건 아니며 나이가 어리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나이가 많으면 보고, 겪고, 들은 것 역시 많으니 자신이 만든 침대가 최고이고 완벽해 내 침대는 옳고 너는 틀리다고 생각할 확률이 확 올라가긴 하지만.
걸어놓은 기성복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입혀 보내는 건 쉽다. 니가 불편해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 그에 비해 맞춤옷을 만드는 과정은 복잡하다. 치수를 재고, 재단을 하고, 재봉을 하고, 입혀보고, 불편한 곳이 없는지 살피고, 수정해서 완성한다. 너 때문에 내가 이 수고로움을 견딜 필요는 없잖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맞춤옷이야. 그냥 맞춰 살아.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끊임없이 공부하지 않으면, 자꾸 날 돌아보지 않으면 꼰대의 길로 들어가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조심조심 단단한 길을 골라 딛지 않으면 금방 곳곳에 숨어 있는 꼰대의 늪에 몸을 담그게 된다.
식당에 가면 막내가 휴지를 깔고 수저를 놓고 물을 따른다. 반찬이 부족할 때 일어나 더 담아오는 사람도 막내다. 차 뒤쪽 가운데 자리 가장 불편한 곳에는 막내가 앉는다. 잔심부름은 막내의 몫이다. 힘이 센 사람은 힘이 약한 사람을 때리고 괴롭히고 위협한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사람을 종처럼 부린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자리를 위협할 것 같은 사람이 보이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아예 싹을 잘라버린다. 스스로 성장할 노력은 하지 않고 남보다 높은 곳에 있겠다는 마음만 앞세워 주변에서 자라나는 풀들을 자르고 깎고 베어버린다. 우리는 나이를, 힘을, 돈을 얼마나 쉽게 휘두르며 살고 있는지. 나이에, 힘에, 돈에 어떤 책임이 담겨 있는지를 얼마나 쉽게 잊고 사는지.
언니는 말했다. “부려야 권력이 아니야.”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가진 것은 당연히 내 것이어서 갖고 있다는 자각을 못 할뿐더러 한번 가진 건 영원히 내 것이라고 착각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어떤 틀 안에서 별 불편함 없이 살고 있다면 나는 권력이 될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는 것이다. 틀 밖을 서성이는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힘. 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그럼 내 말대로 해. 미끼를 던져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 손에 무엇을 쥘 것인가? 틀 밖으로 던질 돌을 쥘 것인가 틀 밖에 있는 사람의 손을 쥘 것인가. 풀을 베어버릴 낫을 쥘 것인가 물이 담긴 주전자를 쥘 것인가. 나는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꼰대의 길로 들어서느냐, 좋은 어른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그냥 ‘어른’으로 살아가느냐가 갈릴 터이다.
언니들은 “희주야, 상의할 게 있어”, “희주야 할 말이 있어”로 시작하는 전화를 종종 걸어온다. 나도 “선배, 고민이 있어요”, “선배, 이럴 땐 어떡해요?”로 시작하는 전화를 종종 건다. 그럴 때면 언니들의 세상에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아서, 내 세상에 언니들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아서 기쁘고 뿌듯하다.
언니들은 만나면 밥값이든 술값이든 찻값이든 계산하기 위해 나보다 먼저 달려 나간다. “선배, 촌스러워요. 요즘 누가 나이 많다고 돈 내요. 다 나눠서 내지.” 맨날 얻어먹는 내가 민망해서 구시렁거리면 “이런 건 선배가 내는 거야” 철벽 방어막을 친다. 그게 선배의, 언니의 역할이라 믿는다. “제가 계산하게 해주세요.” 내가 하도 징징거리면 그래 옛다 오늘은 니가 내라 나 마음 편하라고 가끔 계산대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게 선배가 후배를 예뻐하는 방식, 언니가 동생을 예뻐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사랑이 필요한 아이니까 물주전자에 사랑을 듬뿍 담아서 내 마음밭에 뿌려주고 있다는 걸, 잘 자라라고 보드라운 흙 위를 토닥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틀 밖에 있는 사람에게 손 내미는 법을, 아니 틀 자체를 조금씩 허무는 법을, 내가 조금 수고롭더라도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그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법을,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고 마음을 쓰는 법을,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는 법을 언니들에게 배웠다. 이렇게 배운 걸 언니들 말마따나 후배들에게 실천해야 할 텐데. 흘러온 마음이 또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물꼬를 잘 터야 할 텐데. 머릿속에 있는 걸 몸으로 실천하기는 역시 어렵겠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게 또 다른 의미로 두려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