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 일과는 대충 이러하다. 4시 기상. 7시 반까지 글쓰기. 씻고 아침 먹고 8시 반에 친구네 사무실, 더부살이하고 있는 곳으로 출근.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1시간 조금 넘게 걸려 파주 출판도시에 도착. 커피를 내리며 사무실 식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10시부터 일 시작. 4시 반에 정리. 집에 오면 5시 반.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조금 쉼.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50분에서 1시간 실내 자전거 타기. 씻음. 하루를 정리하고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취침.
일주일에 두세 번, 출근할 때의 일과다. 일주일에 4, 5일 집에 있을 때도 이와 비슷한 하루를 산다. 출퇴근 시간이 빠질 뿐. 대개 평화롭고 그래서 다소 심심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종종 행복한 일상이다. 삶에 느끼는 만족도가 이렇게 높은 적이 있었던가 싶은 나날이다.
본격적으로 교정 일을 ‘업’으로 삼은 지 6개월이 지났다. 물론 2004년 6월에 출판사에 들어갔으니 일을 배우고 시작한 지는 햇수로 15년이다. 회사에 다닌 시간보다 프리랜서로 지낸 시간이 더 길지만 그때는 프리랜서를 하면서도 언젠간 회사에 들어가리란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업이라기보다는 ‘아르바이트’에 가까웠다. 지금은 글 쓰는 삶을 일과 안에 끼워 넣고 직장인의 삶을 빼둔 상태다. 그 두 가지를 병행하는 부지런하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나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 아닌 외부에 에너지를 빼앗기는 쪽인 데다 낯선 곳, 낯선 사람,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몹시 불안해하는 성격이라 나갔다 들어오면 언제나 지쳐 있기 일쑤다. 주변을 안심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고 그렇게 모은 에너지를 글 쓰는 데 투입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했다. 교정을 봐서 원고를 출판사 쪽에 넘기면 다음 원고를 보기 전에 짬을 내 에세이를 한 편씩 쓰자. 하지만 이 계획은 다섯 달 동안 두 편이라는 저조한 기록을 남기고 폐기되었다. 원고를 하나 끝내고 나면 놀고 싶었다. 쉬고 싶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놀아도 돼.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며 살 수 있어. 이건 나한테 주는 보상이야. 쉬어야 일의 능률도 오르지. 그런데 놀고 나면 글을 쓸 새 없이 다음 원고가 도착해 있었다.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원고가 넘어오는 기간이 짧아졌다. 아직 원고를 보고 있는데 다음 원고가 들어와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구두 끝으로 탁탁탁, 바닥을 때리면서. 이렇게는 안 되겠구나. 직장 다닐 때보다 수입은 (매우, 몹시, 많이) 적고 직장 다닐 때처럼 글을 못 쓰면 삶의 풍경을, 삶의 리듬을 이렇게 바꾼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약 한 달 전부터 아침에 글 쓰는 시간을 끼워 넣었다. 다행히 차곡차곡 글이 쌓이고 있다. 일하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었고,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원고가 하나, 두 개, 세 개…, 있어서 초조하긴 하지만 매일매일 꾸준함의 힘은 생각보다 커서 주기로 한 날짜를 크게 어기지 않고(절대 어기지 않도록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원고를 보내고 있다.
늘 그런 삶을 꿈꿨다. 돈이 많아서 책만 읽고 글만 쓰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저기 낯선 나라로 떠나 오래 머물다 올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돈에 허덕이지 않고, 먹고살기 위해 지금 당장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으며 베짱이처럼 링가링가 산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로또나 되면 참 좋겠다….
그러다 운 좋게 기획안이 통과돼 1년간 얼마간의 돈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1년 동안 일을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책만 읽고 글만 쓰며 살 수 있는, 여기저기 낯선 나라로 떠나기엔 다음 달을 살기 어려운 딱 그만큼의 돈을 받으며 1년을 살았다. 이 1년 동안 에세이를 써서 하나하나 모아두고, 같은 듯하지만 전혀 다른 두 편의 장편동화를 습작했다.
마법 같은 1년이었다고 생각한다. 재투성이 신데렐라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과 춤을 춘 시간, 앨리스가 하얀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들어가 이상한 나라를 모험한 시간, 그 시간이 나에게도 주어졌던 것이라고. 1년 동안 나 역시 춤을 추고, 굴속에 들어가 모험을 즐겼다. 그리고 이제 마법은 끝났다. 12시 종이 울렸고, 꿈에서 깨 굴 밖으로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빨간 펜을 손에 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하도록 다듬고, 잘못 쓰인 조사를 고치고, 수동형 문장을 능동형 문장으로 바꾸고, 번역투 문장을 바로잡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사실 나는 자꾸 뒤돌아볼 줄 알았다. 무도회장으로 굴속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발 딛고 선 현실을 부정하고 싫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눈앞에 떠 있는 검은 글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손을 움직여 글자들을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으려니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평화로움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지난 1년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종종 신나고 재밌었지만 늘 불안했다는 걸 깨달았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써나가는 일,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거야 가르쳐주는 이 없는 일, 그토록 매달려서 공을 들였음에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를 일. 답이 없는 일.
이미 완성된 글을 다듬는 건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잘 모르겠으면, 이게 좋을까 저게 좋을까 결정하기 어려우면 물어보고 상의할 동료가 있었다. 내 실수를 바로잡아줄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는, 참고할 기준이 있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으로 조각상을 만들다가 단단한 돌로 만들어낸 장인의 조각상을 사포로 문지르고, 칠을 하고, 깨끗이 씻어내는 일에 투입된 것 같았다. 전장에서 선봉에 나가 싸우다가 후방부대로 물러나 물자를 지원해주는 것 같은 느낌. 이제 나는 살았다는 느낌. 그와 비슷한 안도감이었다.
일하다가 문득문득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싫은 일을 최대한 하지 않으면서 돈을 벌고 있다는 게 행복하다. 글을 쓰다가 문득문득 행복하다는 기분이 든다. 어릴 때부터 꿈이었던 일, 하고 싶었던 일, 그걸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게 행복하다. 집에 돌아와 운동을 하면서 문득문득 행복하다고 느낀다. 완전히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몸속에 폭탄을 안고 있는 분들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럭저럭 삶을 즐기실 수 있는 부모님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고, 그 두 분이 늘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는 딸내미는 체력을 기른다고 실내 자전거에 앉아 자전거 바퀴를 돌리고 있다. 이 평화로움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파주로 출근하는 시간이 나쁘지 않다. 버스 안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게 좋다. 비가 오면, 눈이 오면, 너무 추우면, 너무 더우면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기에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사무실에 가면 좋은 사람들이 있다. 비록 깍두기지만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그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일하는 게 좋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함께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선후배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좋다. 얼마 없는 내 친구 목록에 (내 마음대로) 이름을 올린 그들을 만나 마음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삶에 느끼는 만족도가 이렇게 높은 적이 있었던가 싶게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이다.
삶을 이렇게 세팅하기까지 참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들이 정해놓은 패턴에 따라 산 나날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하게 대학교에 가고, 당연하게 취직을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나날이었다.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서 의견을 내지 않고 사람들을 따라가는 무난한 삶이었다. 내 속에 자리 잡은 욕망이 내 안에서 생겨난 것인지 밖에서 누군가가 집어넣은 것인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삶이었다. 질문하지 않은 나날이었다. 이건 왜 이런가요? 묻지 않고 시키면 하는 사람, 누군가가 ‘이건 왜 이렇게 해요?’라고 물으면 ‘원래 그래요. 그동안 그렇게 해왔어요’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딱히 이런 ‘나’에서 이런 ‘삶’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나’라는 인간을 열심히 생각하고, 분석하고,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때’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이 사람은 왜 좋아하고 저 사람은 무엇이 불편한 걸까,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가,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언제 행복하고, 언제 마음 아파 하는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무엇을 혐오하는가….
그렇게 도출해낸 나름의 대답을 늘어놓고 좋아하는 건 이쪽, 싫어하는 건 저쪽, 좋아하지만 못 하는 건 저기, 싫지만 해야 하는 건 여기 이렇게 분류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삶은 너무 거창하니까 하루를 채워 넣었다. 사람의 일이란 예측할 수 없어서 돌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고, 전에는 좋았지만 지금은 싫어진 일 혹은 전에는 싫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진 싫지 않은 일이 생기기도 하고, 나는 절대 못 할 것 같은 일을 하게 되는 때가 오기도 하여 기껏 세팅해놓은 하루하루를 자의로든 타의로든 허물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여기에 도착했다. 만족도가 꽤 높은 하루하루의 삶에.
아직도 그런 삶을 꿈꾼다. 책 읽고, 글 쓰고, 여기저기 낯선 나라로 떠나 오래 머물다 오는 꿈. 하지만 이제는 떠난다 해도 지금과 비슷한 하루하루를 살 것 같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일을 하고, 잠들기 전에 책을 읽는 삶. 낯선 나라니까 거리 산책 정도는 넣어줘야지.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한다. 그의 영화를, 그의 글을, 그의 생각을 좋아한다. 《걷는 듯 천천히》에 적힌 그의 문장을, 그의 생각의 조각을 수첩에 옮겨 적어두고는 틈날 때마다 펼쳐 읽는다.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생명은 그 자체로 ‘기적’인 거야.”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결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그것을 타자로부터 채운다.”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땡땡땡, 12시 종이 쳐서 집에 돌아오니, 신비한 모험을 끝내고 굴 밖으로 나와 보니 별것 아니었던 삶이, 구질구질해 보였던 일상이,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순간의 즐거움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집의 편안함을, 나무 밑 그늘과 동쪽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의 시원함을 깨닫게 되었다.
마법이 마법을 낳는 삶.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생명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삶. 나의 결핍을 누군가가 채워주는 삶. 누군가의 결핍을 내가 채워주는 삶. 그렇게 손 잡고 나아가는 삶.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다워 보이는 삶. 결핍을 가능성으로 보는 삶.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삶. 나는 계속 그런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