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세이] 혼자만의 동굴

2018년 9월의 쉼표 : 파리 & 스위스

by 평생사춘기


나의 20대가 초반 정점을 찍고 떨어져 천천히 꾸준히 올라오는 그림의 그래프였다면, 30대는 롤러코스터를 그린다. 뚝 떨어지고 우뚝 솟았다가 2018년 바닥을 찍고 있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사에서의 팀장 역할은 익숙한 듯 여전히 마음의 상처를 받으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고,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에서도 피투성이가 되어 그 채로 홀로 서서 도움의 손길조차 피하며 모든 게 두려웠다.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동굴을 찾아 숨어버렸다.


그렇게 불안정한 나로, 홀로 여행을 떠났다. 먼저 꿈에 그리던 에펠탑을 보러 파리행 비행기를 사버렸다. 그리고는 나의 버킷리스트인 알프스 패러글라이딩을 위해 스위스를 욱여넣었다.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 박힌 돌덩이라도 하나 끄집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강가에 앉아 에펠탑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래, 드디어 파리에 왔구나. 이방인, 그 누구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있는 시간, 일단 모든 걸 잊어버리자. 상처가 자꾸 쿡쿡 후끈후끈 욱신거려도 덮어두자.


오르세 미술관 투어를 가기 위해 아침 일찍 파리 시내를 걸었다. 햇살이 얼굴에 내려앉아 눈을 잠시 가만히 감았다 뜨니, 저 멀리 미술관이 푸른 나무 사이로 보였다. 해설사를 졸졸 따라다니며 맨 앞 줄에서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프랑스의 역사와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듣자니 이 도시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런 게 마음의 양식이라 부르는 건가.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한참을 달리고 나니 아름다운 자연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푸르른 물빛을 만났다. 브리엔즈, 하얀 예쁜 배를 타고 내가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30분쯤 달려, 동화 나라에 도착했다. 나는 지금 완전히 이 세계에 들어와 버렸다. 머리에 이 아름다움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곤돌라를 타고 높이 높이 구름 위로 올라서니 다른 세상에 들어온 듯, 맑은 하늘이 눈비로 뒤덮였다. 눈이 섞인 우박이 내려, 야무지게 우비를 사 입었다. 비라면 질색을 하는 나인데,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풍경에 마냥 행복했다. 1시간쯤 걸어 호수에 도착해 호스텔에서 준비해 온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었다. 돌아내려 오는 길, 거짓말처럼 하늘이 깨끗해졌다. 이번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스위스, 나는 참 운이 좋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 패러글라이딩.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지금 이 방황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차를 타고 한참을 올라갔다. 차를 세워 장비를 들고 조금 더 걸어 올라갔다. 준비를 하려는데, 분위기가 수상하다. 수신호가 보이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바람이 세서 할 수 없단다. 아쉽고 아쉽고 아쉬웠다. 나의 버킷리스트도, 이 방황에 대한 답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리기산 정상, 잊지못할 최고의 뷰
시원하다.
길을 잃어도 괜찮아, 이런 곳을 발견했잖아.
눈비가 내려도 괜찮아, 이런 풍경 속을 걸었잖아.
바람불어 좋은 날
낯설어도 괜찮아, 이렇게 웃으면 됐잖아.
소원을 빌자.
내가 지금 여기에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