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있으면 죽겠지 싶어서 떠난다. 진짜 죽을 자리일지도 모르는 곳으로.
대기업에서 40대라는 나이는 자리를 보전해야 하는 나이이다. 3년 전에도, 2년 전에도, 1년 전에도 업무를 추가해 주세요. 바꿔주세요 라는 요청에 계속 들은 피드백이다. "너 정도 되면 이제 실무자로 들어가는 건 안 돼. 어떤 업무나 부서를 맡아서 해야지.'" 그런 자리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싸워서 얻어줄 것도 아니면서 부서장들은 무의미하게 말한다. 단지 나는 변화가 싫고, 쟤도 그냥 있으면 나는 참 편하니까. 그래서 큰 일이 아님에도 나는 10년을 한 자리에 있었다. 넘치는 열정을 어학에도, 취미에도 들여보았지만 그 공허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나의 인정 욕구를 채워주기에 지금 일은 너무 익숙해져서 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도, 개선을 해도 그런가보다 묻히기 일쑤였다. 격렬히 일하고 격렬히 칭찬받고 싶은데, 기본을 하나 플러스 알파를 하나 나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해졌다.
변화를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았으나, 결심 후에는 바로 일을 쳐버렸다. 그래서 이동일이 정해졌고, 계속해서 "왜 옮겨?"라는 끊임없는 질문을 만나게 되었다. 주판알을 튕기는 사람에게 내가 한 선택은 아주 바보같은 선택이니까. 이동해서 메리트가 있어?
- Q) 월급? A) 그건 똑같아. 연말 보너스도 똑같이 받는 곳이거든. 잔업비..는 많이 받게 되겠지? ㅠㅠ Q) 승진은? A) 나는 이미 승진할만큼 했어. 임원 되는 건 이미 태생이 달라서 불가능하고, 부장까지 승진한거라 난 이미 끝났어. Q) 워라밸은? A) 그건 완전 나빠지지. 여기서는 주 40시간도 맞추느라 일부러 야근하는 날도 많았는데, 가면 당분간 자율출퇴근은 물론 애들 얼굴 볼 시간도 없겠지 - 라는 질문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무기력함이 내 자존감을 자극해서 내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같은 일을 하는 무기력함에 새로운 변화를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말을 해도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 없어서 소리높여 말하는 법을 점차 잊었고, 회사에서 있는 시간에 다른 일을 준비해볼까 해도 이런 다른 일을 하는 모습조차 너무 눈치가 보여서 집중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미라클 모닝으로 새벽에는 아주 효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효능감 높은 인간임에도 낮 시간에는 아무것도 아웃풋을 내지 못하며 시간을 낭비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사내 상담소까지 의존해야 하는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갖게 되었다. 회사에서 한량같은 생활을 하며 멘탈을 강하게 유지하고 사는 멘탈갑인 분들이 내가 다다를 수 없는 롤모델임을 한번 더 깨달았다.
그래서 난 뛰쳐나가기로 결심했다. 몇 군데 컨택해서 빠꾸를 먹은 후로 무조건 나를 받아주는 곳으로 탈출하겠다고 결심했고, 기회가 생겼고 탈출이 결정되었다. 회사에서 40대에, 스탭에, 여자에, 부장은 어디에도 쉽게 갈 곳이 없었다. 자유로운 조직내 이동을 권장하는 여러가지 인사 제도들이 도입되고 있지만, 대상자는 대부분 과차장까지이지 부장급은 대상자에서 빠져있다. 사실 부장급이라 하면 실무가 아니라 관리자인데 여기저기 관리자와 관리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넘쳐나고 굳이 다른 부서에서까지 받을 이유가 없을테지. 그래서 나를 아는 검증된 줄을 통하지 않고는 이동의 루트는 막혀 있고, 결국 나도 아는 사람을 통해서만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안그래도 겁이 많은 성격에 오랜 기간의 한량 생활을 뒤로 하고 가는 길이라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손들고 왔다면서 왜 이렇게 아는 게 없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 쟤 누가 데려왔어? 저렇게 기쓰고 한다고 뭐 되지도 않을텐데 왜 저래? 보고서 당장 써야하는데 머리속에서 맴 돌기만 하고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보고서를 쓰고 있는 모습 등등 생기지도 않은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쓰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러다가 개 욕 먹고 활활 타다가 타 없어지는거 아냐? 완전 병신 인증되어서 갈 곳도 없이 퇴사해야 하는거 아냐? 그래 육아휴직이라는 카드는 남아 있으니 죽을 꺼라고 생각은 말자. 아 그러다가 진짜 죽으면 어떡하지. 머리속에서 비극 영화 백만편은 찍다가, 단기간에 될 것도 아닌데 이곳저곳 자료를 뒤져보지만 복잡한 머리속에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어서 열었다가 접기를 몇수십번 반복한다.
생각하다 지쳐지쳐 될 대로 되라지 라고 포기해버렸다. 그래 40대까지 회사 다닌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기회가 맞으면 희망퇴직 하거나, 육아휴직하고 아이들 영어교육 시키러 외국 나가면 되지 라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안그러면 생각의 무게에 어깨가 짓눌려서 제대로 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난 두 개의 카드가 더 있고, 혹시 알아 날 받아주는 곳이 또 있을수도 있으니 카드는 세 개다. 세 개의 카드를 마음에 간직하고 그냥 편하게 가자.
1~2년만 해도 전문가 소리 듣는게 회사인데, 2년만 견뎌보자. 그리고 나면 한결 살기 쉽겠지. 아님 말고 라고 한없이 가벼워지기로 했다. 별거 아니라 경험치 하나 쌓으러 가는거야. 아직 회사에서 일할 날이 20년도 더 남았는데 , 기대 수명을 생각하면 40~50년을 일해야 하는데, 3년에 경험치 하나씩 쌓는다고 하면 6개에서 16개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이다.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그냥 저지르자. 그렇게 가볍게 가볍게 날라가기로 했다. 업무보다 사람을 찾아서. 단지 난 더 일하고 싶었을 뿐이다. 뒷방 늙은이가 되기에는 아직 젊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