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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정치학 | 뤼번 파터르 [북리뷰]

by HH

트레바리 독서모임 참가를 위한 독후감 마감이 하루 남짓 남았다. 뤼번 파터르의 '디자인 정치학'을 읽어 내려가며 초반의 사례들-"번체자를 옹호하는 측은 간체자를 쓰는 사람들에게 심장이 없다고 한다. 사랑을 뜻하는 번체자 愛(아이)에는 심장을 상징하는 글자(心)가 들어 있는데, 간체자 爱(아이)에는 친구를 뜻하는 글자(友)가 대신 들어왔다는 말이다. 이에 간체자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번체자를 쓰는 사람들을 가리켜 친구가 없다는 식으로 반론한다."와 "외국의 브랜드 이름은 중국어로 번역될 때 음을 빌린다. 1928년에 코카콜라는 骒马口蠟(커커컨라)로 번역됐는데, 뜻을 보자면 “밀랍 올챙이를 물어라.” 내지는 “밀랍으로 채워진 암말”이다. 판매실적이 저조하자 코카콜라 측에서는 발음이 비슷하면서 뜻이 좀 더 적절한 200개의 조합어를 검토했고 “입 안의 행복”이라는 뜻의 可口可乐(커코컬러)를 최종적으로 골랐다." 등이 흥미로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장을 닫고 마감 전날이 될 때까지 미루고 미루다,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휘리릭 읽어 끝냈다. 나는 과연 파워 J가 맞을까? 학창 시절에 늘 벼락치기하던 버릇이 일을 하면서도 마감 직전에 밤샘을 자처하며 긴장을 즐기는 습관으로 이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락치기나 밤샘조차 내 계획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책의 리뷰는 어떻게 써야 할지 너무 막막해서 불편한 마음이 가득했다.


끝까지 읽으며 그래서 작가의 결론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마지막 챕터까지 사례의 나열에 그쳐, 그럼 난 가장 공감하는 대목부터 찾아보고 내 생각을 정리해 보자고 노트북을 켠다.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는 이와 같은 문화진화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문화는 보다 높은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과 생각의 상호작용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문화라는 렌즈를 통해 다른 문화를 바라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문화를 통해 판단하기 때문에 문화적 편향성을 의식적으로 배제하려고 해도 완벽한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책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타문화에 대한 무지가 의도와 무관하게 때론 폭력이 된다는 것을 늘 자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중립적이지 않고, 시각 커뮤니케이션은 권력을 담고 행사하기 때문이다. AI가 침투하지 않은 영역이 없는 이 급변하는 시대에 출판한 지 시간이 상당히 흘러버린 사례들이 호소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현존한다.


난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말고 살자라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철저한 개인주의자이다. 아직 부모님과 함께 거주하는 싱글로 이타주의자 성향이 강한 엄마의 강요에 의해, 어린 시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지인들에게 그리고 식구들에게 상당히 쏟고 있긴 하지만,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면 충분한 충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뿌리 깊게 내가 중심인 사람인 건 확실하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몽상가에 가까웠다. 아름다운 공간에 들어서면 행복한 사람이기에, 공간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했고, 그 당시 환경디자인 전공 (현 공간디자인)은 건축공학을 배제하고 공간의 외부와 내부의 심미적인 기능을 가장 강조한 교육을 했다. 따라서 전공자들은 각 분야의 디자이너가 되거나, 아니면 건축공학을 석사로 선택하는 갈림길에 섰던 것 같다. 공간디자인을 공부하며 한때 건축가를 꿈꾸던 난, 루이스 칸 (Louis Kahn)의 아들이 만든 My Architect (2003) 다큐멘터리를 대학교 3학년 수업 시간에 보고, 다행스럽게도 건축가의 꿈을 깔끔하게 접었다. 건축가란 문화, 역사, 지리 등 수많은 영역을 섭렵하고 반영하며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과 책임감이 소스라치게 무서웠다. 소크 생물학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도서관 (Philips Exeter Academy library)이 건축학적으로 걸작이지만 특히 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 있는 국회의사당의 건축과정을 보며, 뤼번 파터르의 디자인 정치학에서 다룬 시각 커뮤니케이션은 아니더라도, 공간디자인의 힘에 움츠러들며 덜컥 겁을 먹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현시점에도 AI 이미지 생성 도구와 이미지 알고리즘이 문화적 강자를 반영하는 두드러진 결과를 반영하거나,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을 겪는 세대나 약자를 배려치 않거나, 이모지와 같은 디지털언어나 공공디자인에서 영어를 기본으로 하는 언어 선택이 다수가 아닌 집단을 배제하고 있다. 현재도 젠더에 대한 담론과 검열이 있고, 과연 올바른 답이 무엇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작가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성별이 쉰여덟 가지"라고 하는데 편향적 이미지에 학습이 된 옛 사람인 난 어리둥절할 뿐이다.


2006-2009년 뉴욕에 거주할 때 게이들이 많이 사는 주거지로 유명한 첼시에 학교가 위치했고, 3년 동안 학교 코 앞에 살았었다. 유명한 TV show, Sex and the City처럼 절친이 된 성소수자는 없었더라도 이웃으로 수없이 자연스레 마주쳤던 것 같다. 유학 직전에 다니던 인테리어 회사에 사표를 내는데, 뉴욕에서 공부하고 국적이 미국이었던 사장님의 "아마도 네가 마음에 쏙 들만한 남자는 게이 밖에 없을 거야."란 말을 우스갯소리로 넘겼는데, 집 앞 Whole Foods에서 장을 보며 깔끔하고 세련되며 말끔하게 자신을 가꾸는 아름다운 인간 남자를 매일 스쳐 지나가거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동네 영화관에 게이들 커플 사이에서 덩그러니 앉아있는 동양인 여자 1인이 되었을 때 사장님의 말을 떠올리곤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동네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릴 때 헬스 트레이너 같은 우락부락한 근육질 체형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미니스커트, 진한 비비드 컬러의 립스틱을 한 누군가가 가벼운 인사가 아니라 나와 수다를 떨고 싶은 듯 말을 건네며 끊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기습한 공포를 들키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다, 바쁘다 거짓말을 하고 카페에서 뛰쳐나온 경험이 잊히질 않는다. 난 내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한 대상에 비호의적이었나? 아니면 나와 다름에 대해 두려움을 가진 걸까? 가벼운 생각을 할 뿐이지만,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의 어떤 이들은 다양한 젠더에 대한 수용과 현재의 교육이 자아를 형성하는 아이들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토로하며 정치를 비판하기도 한다. 현재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나와 다른 열려있는 사고를 할까? 아니면 젠더를 바꾸려는 비율이 후천적으로 증가할까? 다수를 중심으로 한 결정이나, 소수를 배려하기 위한 결정이나 어떤 선택도 권력이 된다. "모든 디자인은 현상 유지에 기여하거나 현상을 전복하기 마련"이다.


"디자인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기대하는 것은 서구사회의 디자인교육에서 가르치는 모더니즘디자인의 원칙이기도 하다." 그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각자가 가진 문화적 시점에 따라 너무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다양성이 중시되는 현 사회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은 언제나 중심과 파워의 가진 자의 주관이고 특수성일지도 모른다. 가장 재미나게 봤던 세계 지도에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며, 아름다움을 갖춘 디자인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말처럼 "세계의 다른 문화권에 대해서도 인식을 높여야 마땅"하다. 20년 전, 한국인인 내게 뉴욕에서 마주친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서 왔어요?"란 의아한 질문을 했었다. 그들에겐 한국 자체가 관심밖의 작은 나라였고, 그나마 뉴스에서 접하는 Korea란 북한과 김정일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제 뒤늦게 케이팝 데몬 헌터스 (K-Pop Demon Hunters)를 보고, 이토록 한국문화를 아름답게 반영한 변화에 대해 경이롭다 느꼈다.


디자인 정치학을 읽으면서도 내겐 익숙한 원근법이 생소한 문화권인 경우 전혀 다른 해석을 가져올 수 있단 것은 생각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 사회가 항상 다문자 환경에 있었고, " "시각정보 해석 능력이 문해력과 연관이 있고", "미적으로만 판단하다가 오해를 초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를 인용하며 책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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