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마놀로 블라닉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마놀로: 슈즈 메이커의 전설(Manolo: The Boy Who Made Shoes for Lizards)>를 보면, 그가 정치적 메시지나 사회 운동에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 잘 드러난다. 어두운 사회적 이슈를 쫓기보다는 평화롭고 단조로운 삶에서 행복을 찾는 '현실도피적 탐미주의'를 보며, 내가 꿈꾸는 성공한 예술가의 삶이라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그동안 나의 정치적 무관심을 깊이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더라도, 좋아하는 과목에는 눈빛이 반짝거리며 총명해 보이는 아이였으나, 이상하게 역사 시간에는 멍 때리는 시간이 참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야 경제에 슬쩍 관심을 갖기 위해 노력 중이나 무지함을 채우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런 내게 메이지 유신부터 전후 고도성장기까지, 일본이 어떻게 현대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고 경제 대국이 되었는지를 다루는 태가트 머피의 『일본의 굴레』 1부는 솔직히 소화하기 벅찬 방대함이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어린 시절 교육을 통해 바라본 일본은 "자기 연민에 빠진 채 아시아 사람들 전체에게 커다란 고통을 일으킨 원인은 전혀 돌아보지 않는 나라", 역사적으로 파렴치함으로 느껴졌던 것이 가장 컸다. 책에서 언급했듯, "일본이 중국과 한국의 울분을 사는 이유는 일본 정부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입장 표명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과거에 이런 일이 일어났고 (2)그것은 대부분 일본의 잘못이다 (3)일본은 그런 일이 절대로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이고 (4)그 보장을 위해 되돌릴 수 없는 제도적인 조치를 취했으니 우리를 믿어도 좋다."라는 일본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는 자아를 형성하는 십대 동안 끊임없이 교육을 통해 들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엄마라는 필터를 통해 자주 들은 일본인 개인의 친절함과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에 대한 경탄은 늘 의문점을 가졌었다. 엄마도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은 외조부모가 접한 일부 일본인에 대한 기억- 타인을 잘 헤아리고, 지식과 친절을 베풀었다고 이야기를 듣고 성장했기 때문에 일본 영화나 문화를 좋아하고 호의적인 엄마 밑에서 자란 나도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과 동시에 호기심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한 도시가 한 나라를 투영하진 않지만, 여행을 다니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순수하고 따뜻하다고 느낀 도시는 포르투갈의 '포르투'였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친절했던 도시는 '도쿄'였다. 일본인들의 말에 진심이 담긴 것은 아니라는 경고를 들었는데, 한 사고로 나리타 익스프레스가 운행 중단 되었을 때, 도쿄역을 지나치고 나니 환승 안내 방송이 일본어로만 나온 적이 있다. 구글맵에만 의존해서 가기엔 불안해서 지하철에 탄 일본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일본어를 못 하는 나를 무사히 나리타 공항까지 가는 환승 플랫폼에 직접 데려다주고 별 일 아니란 듯 덤덤해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친절이었다. 이것이 늘 엄마가 간접경험으로 들었던 일본인의 태도인가? 책의 큰 흐름과는 상관없지만, "덴푸라는 틀림없이 포르투갈 요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 일본에는 그 전까지 튀긴 음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덴푸라라는 단어 자체도 아마 당시 포르투갈어로 시간을 의미하는 템포레tempore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포르투갈의 영향은 언어에까지 미쳤다. 고맙다는 뜻의 일본어 단어인 아리가토는 포르투갈어의 오블리가도obbligado에서 왔을지도 모르고, 빵pan이라는 단어도 명백하게 포르투갈어에 그 어원이 있다." 이 부분을 읽다가 친절한 두 기억이 오버랩되며 미소가 지어진다.
1부를 다 읽고 나니, 태가트 머피가 묘사하는 일본의 성장사에서 '곤조'의 양면성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고도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전후 폐허 속에서 '하면 된다'는 식으로 몰아붙였던 관료와 노동자들의 지독한 근성과 전쟁의 실패와 엄청난 성장이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게 시스템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 방식대로 그대로를 고수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집단적인 고집은 마치 동전의 양면 같다. 한국에서 아직 애플페이를 이용할 수 없었던 오래전 도쿄를 여행할 때, 애플 워치와 스이카로 간편하게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경험이 편리한 도시였음에도, 아직도 불편한 동전과 현금을 많이 고집하고 사용할까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변화를 두려워하는 역사를 읽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된다.
20년 전 즈음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드로잉 시간에 미국인 교수님이 에도시대의 우키요예를 포함한 일본의 우아하고 수려하고 유연한 선과 필압 등을 훌륭한 예시로 보여준 적이 있다. 개인적인 취향으론 일본 건축의 선이나 조경이 인위적이라 느껴, 좀 더 자연스러운 선과 여백이 있는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을 더 사랑하고, 일본의 옛 드로잉이 우리나라의 풍속화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서양 사람들은 일본 문화에 더 마음을 빼앗길까? 속상한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K-culture이 이렇게 부상할 거라고 생각지 못 해서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도쿄를 다섯 번 방문을 하고 난 지금은 일본만의 정교한 취향과 세렴 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일본 생활의 모든 부분에 녹아 있는 정교한 취향과 세련됨은 헤이안 궁정의 극도로 귀족적인 미학에 그 뿌리가 있다. 일본 료칸旅館에 도착해 객실에 놓인 완벽한 형태의 꽃꽂이를 볼 때나, 백화점에서 배달된 물건이 우아한 글씨의 제품 설명과 함께 계절을 암시하는 기막힌 포장에 담겨올 때나, 자동차 문을 열면 만나는 깔끔한 라인과 외형 마무리에 들어간 집착에 가까운 디테일을 볼 때면, 당신은 1000년 전 헤이안 귀족들의 외형에 대한 집착과 그 시절 섬세한 미학의 편린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미는 덜어냄에 있었다면, 일본은 완벽한 배열의 추구에 있었던 듯하다. 현재까지도 독보적인 디테일의 감각은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책을 통해 그들의 역사를 알아가며, 켜켜이 쌓인 레이어와 선들이 좀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그들의 장인정신이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태도를 지목했다. 일본 사람들은 시끄럽게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일들에서 쾌락을 찾는다. 허황된 꿈이라도 그 꿈을 놓지 않는 어쩔 수 없는 로맨티시스트들이다."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 문구이다.
독서 모임의 멤버들이 '가부키'를 다룬 영화에 대해 호평을 나눌 때, '국보'라는 영화가 궁금했었는데, "가부키극, ‘풍류세계’의 유곽과 찻집을 묘사한 목판화인 우키요에, 즉흥적으로 읊었던 하이쿠, 이런 것들이 모두 17세기 일본의 번성하는 신도시로 모여들었던 한가한 젊은이들로 인해 생겨났다."는 작가의 설명을 들으니 서브컬처로 시작된 그들의 문화를 더 이해하고 싶어졌다. "가부키歌舞伎라는 말도 사실 이 젊은이들을 부르던 ‘이상한 사람[가부키모노かぶき者]’ 혹은 ‘색다르다[가부쿠傾く]’라는 뜻의 단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제목을 통해 연상해 보건대 지금은 '국보'로 대접받는 문화가 시작은 서브컬처에서 메인스트림이 되는 긴 시간과 역사가 흥미롭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지만, 모방이 아닌 로컬라이징의 기술도 놀랍다. 그 예로 "일본에는 서양 요리는 아니지만 메이지 시대에 유럽 요리를 개조한 요쇼쿠洋食(양식)라는 음식 장르가 있다. 잘 알려진 양식의 예로는 돈가스(튀긴 돼지고기. 가스는 커틀릿cutlet의 일본식 발음), 오무라이스(밥을 오믈렛으로 감싼 요리), 카레라이스(밥과 함께 나오는 카레. 영국식 인도 요리의 일본 버전) 등이 있다." 일본화되 요리를 들 수 있는데, 외국어 단어를 가져와 카타카나라는 자기들만의 문자 체계로 가두어버리는 과정과 함께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의 하이브리드적 유연함은 다른 나라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인 포인트가 된다.
2부를 기대하며 1부를 다 읽은 후 남는 키워드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와 "어리석은 짓"이다. 머피는 일본 정치의 비극을 '누가 결정하는지 모른다는 것'에서 찾는다. 결정권자가 없기에 수정이 필요한 순간에도 한번 정해진 경로를 이탈하지 못하고 강박이 비극을 초래한다. 대한민국도 일본에 이어 단기간에 초고도 성장을 이루었고,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이다. 일본에 버금가는 고령화로 재빠르게 가고 있는 선두 나라이기에 일본의 역사를 읽으며 기시감이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AI가 지배하게 될 앞으로의 다변화된 세상에 대한민국의 기득권과 고령층은 일본 보다는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하며 역삼각형 구조를 현명하게 헤쳐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