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필 이야기
제주 어느 식당, 한쪽 벽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사람 목소리가 아니라, 종이와 테이프로.
나무 결 위에 하얀 종이 조각들이 겹겹이 붙어 있었다.
투명 테이프는 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공기가 갇힌 자리마다 뿌옇게 떠 있었다.
붙였다 떼고 다시 붙인 흔적들이 벽에 층을 만들고 있었다.
메모는 가지런하지 않았다.
모서리는 제멋대로 들떠 있고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수선함이 이 벽을 더 믿게 했다.
손님들이 지나가며 남긴 말들이라서.
감사 인사, 응원, 날짜, 이름, 하트.
어떤 글씨는 굵고 어떤 글씨는 얇았다.
같은 검은색인데도 누군가는 또박또박 눌러썼고, 누군가는 급하게 휘갈겼다.
중간쯤에서 눈이 멈췄다.
“나는 군필이다.”
조금 아래에는,
“나는 연필이다.”
진지한 선언 같은 문장들이 벽에서는 장난처럼 앉아 있었다.
웃기기도 했고, 왜인지 모르게 안심도 됐다.
여긴 이렇게 써도 되는 곳 같아서.
그 옆에서 또 다른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내 친구는 유필이다.”
끝에 작은 서명이 붙어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몇 장의 메모가 묘하게 같은 방향으로 닫혀 있다는 걸 알아챈 건.
끝이 비슷했다.
‘… 필.’
쓴 사람도 다르고, 쓴 날도 다를 텐데.
서로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이유로 남긴 문장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글자로 끝을 맺고 있었다.
나는 벽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테이프 아래 눌린 종이들이 바람도 없이 미세하게 들뜨고,
겹쳐진 모서리들이 서로의 글씨를 조금씩 가리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읽다가 손이 종이 쪽으로 갔다가 멈췄다.
손끝이 닿는 순간 이 다정한 우연이 깨질 것 같아서.
‘필’은 누군가에겐 이름의 조각일 수도 있고,
그냥 순간의 말장난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든 이 벽에서는 충분했다.
말을 나눈 적도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같은 끝’을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옆에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다.
벽 아래쪽엔 빨간 압정 하나가 박혀 있었고,
플라스틱 케이스가 테이프에 기대어 있었다.
쟁반의 붉은 모서리가 나무 벽에 닿아 있었다.
이런 사소한 물건들까지도 이 벽이 ‘누군가의 자리’라는 걸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식당을 나서며 벽을 한 번 더 봤다.
내일도 누군가가 메모 하나를 붙여놓고 갈 것이다.
끝이 어떤 글자든, 테이프는 또 한 겹 늘어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보고,
지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