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시보드 메모와 첫인사
비가 그친 새벽, 도로는 아직 젖어 있다. 나는 시동을 걸기 전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내린다. 먼지가 없어도 꼭 그렇게 한다. 그 짧은 동작이 없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 것 같다. 손바닥에 남는 감촉이 ‘오늘도’라는 말을 대신한다.
삼십 년 넘게 택시를 몰았다. 혼자 산 지도 오래됐다. 사람들은 가끔 결혼은 안 하냐고 묻지만, 나는 이제 “이대로도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조용함이 내 생활의 기본값이었다. 손님이 타고 내릴 때 생기는 소리들—차문 닫히는 소리, 안전벨트 딸깍 잠기는 소리—그 뒤에 따라오는 침묵까지 포함해서, 내 하루는 늘 같은 박자로 흘러갔다.
어젯밤 TV에서 질문 하나를 들었다.
화면에는 부부가 앉아 있었다. 식탁인지 소파인지, 둘 사이 거리는 가깝지 않은데 멀지도 않았다.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말끝을 고르는 사람처럼,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당신이 살아있을 때, 나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있다면... 뭐야?”
아내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한 번 내렸다가, 천천히 남편 쪽으로 올렸다. 웃으려다가 멈춘 얼굴. 그 사이로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아내가 말했다.
“당신 참 고마운 사람이었어.
당신이 있었기에 내가 있었어... 고마워.”
그 말이 끝나자 화면은 잠깐 멈춘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리모컨을 쥔 손을 멈췄다. 방 안은 조용했고 냉장고만 웅— 하고 울었다. 소주를 한 모금 넘기는데, 목보다 가슴이 먼저 뜨거워졌다. 나는 그 질문을 나에게 돌렸다.
내 마지막 말은 뭐지.
나는 나에게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지.
다음 날, 그 문장이 운전대 위에 계속 남아 있었다. 손님들은 목적지만 말하고 핸드폰을 봤고, 나도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신호에 걸려 멈추면 정적이 커졌다. 조용함이 ‘편한 침묵’이 아니라, 누가 내 숨을 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이 없어서 편했던 게 아니라, 말이 없어서 내가 더 또렷해지는 순간들이 생겼다.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뒷좌석이 아니라 내 안쪽 어딘가에 난 빈자리.
점심 무렵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다. 비가 그친 뒤 햇빛이 올라오면서 아스팔트에서 뜨거운 김 같은 냄새가 올라왔다. 컵라면과 커피를 들고 택시로 돌아오며, 내 차가 유난히 ‘텅’ 비어 보였다. 손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사람의 기척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공기만 남아 있었다.
무심코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늘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영수증이 쌓였는지, 동전이 잘 들어있는지. 그때 손끝에 얇은 종이가 걸렸다. 예전에 누가 두고 간, 구겨진 메모였다. 모서리가 해지고 접힌 자국이 진했다.
‘기사님 덕분에 늦지 않았어요.’
예전 같으면 다시 접어 넣었을 문장인데, 그날은 펴서 한참 읽었다. “덕분”이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따뜻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 내 존재를 문장으로 붙잡아둔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아팠다. 나는 늘 지나가고, 지나가면 잊힌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누군가의 하루에 나는 잠깐이라도 박혀 있었다.
그 순간, 단어 하나가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외로움.
없었던 감정이 새로 생긴 게 아니라, 늘 있었는데 이름을 안 붙였던 것뿐이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 외로움은 성질이 바뀌었다. 조용함이 ‘익숙함’이 아니라 ‘부재’가 됐다. 누가 내 옆자리를 비워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비워둔 자리처럼.
그때부터 외로움은 기다리는 감정이 됐다.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기다리게 만드는 감정. 차문이 닫히면 고요가 밀려왔다. 라디오를 켜도 외로움은 그대로였다. 소리가 외로움을 덮는 게 아니라, 외로움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DJ 목소리와 음악 사이, 광고 멘트가 끝나는 순간, 그 사이사이의 빈틈에서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 있지?’ 하고.
문득 알게 됐다. 내 하루에 스쳐 가는 사람들이—잠깐 타고 내리는 손님들, 편의점의 인사, 새벽 국밥집의 “뜨끈하게 드세요”—그 사람들이 내가 모르게 생긴 균열을 조금씩 메우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걸 ‘원래 그런 것’처럼 지나쳤다. 균열을 메우는 존재가 늘 있었으니, 균열이 있는지도 몰랐던 거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먼저 말을 꺼내보기로 했다. 말은 원래 쉽다고 생각했다. 손님에게 “어디로 가세요”는 잘 나왔으니까. 그런데 다른 종류의 말은 달랐다. 입이 먼저 안 열렸다. 말은 혀끝에서 멈췄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마치 내가 말을 걸면, 그동안 못 본 빈자리가 더 크게 드러날까 봐 겁이 나는 것처럼.
늘 같은 시간에 타던 손님이 조용히 뒷좌석에 앉았을 때, 나는 아주 작게 말했다.
“오늘... 춥죠.”
손님이 잠깐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그러게요. 바람이 매섭네요.”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정적이 조금 얇아졌다. 외로움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외로움이 혼자서 덩치를 키우는 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택시 안에 ‘둘이 있다’는 감각이 아주 얇게 생겼다. 바람이 잠깐 방향을 바꾸듯이.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펜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종이는 깨끗했고, 방은 조용했고, 냉장고는 여전히 웅— 하고 울었다. 나는 펜 끝을 종이에 대었다가 떼었다가 했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다.
한참 후에야 아주 평범한 문장을 적었다.
‘큰일 없었던 건, 네가 버틴 덕분이다.’
다음 날 아침, 그 종이를 대시보드 한쪽에 붙였다. 손님들 눈에는 잘 안 띄는 자리. 내가 볼 수 있는 자리. 시동을 걸기 전, 운전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 잠깐 멈추고 그 종이를 봤다. 종이 한 장이 내 앞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을 붙들었다.
“그래도... 잘 왔다.”
비 갠 도로 위에서 신호등 불빛이 길게 번졌다. 대시보드의 작은 메모도 함께 번져 보였다. 그 한 장이, 오늘의 빈자리에 붙어 있었다.